김영배 상임고문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유정열입니다. 신문에는 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올리고 있는 평범한 시민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렇게 민주당의 큰 어른이신 김 고문님께 건방지게 글을 올림에 대해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느닷없이 펜을 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어제 저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기사를 봤기 때문입니다. 고문님께서 신당 창당의 산파역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전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놀란 정도가 아니라 충격을 받아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김영배 민주당 상임고문님이 진짜로 그 일을 맡아서 뛰고 있습니까? 아니겠지요. 제가 잘못 봤겠지요. 김 고문님이 설마 자신이 그 동안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무너뜨리는 그와 같은 일을 나서서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집에 배달된 신문을 보고 전 믿기 어려운 그 일을 슬프게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일개 평범한 소시민이 김 고문님께 화를 내야 기별이야 가겠습니까마는, 제 성질에 못 이겨 그런 것이니까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저는 김영배 상임고문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고문님의 외모가 특이하고, 어렵고 힘든 군사독재시대에 가시밭길인 야당의 길을 초지일관 걸어온 분이기에 제 머릿속에는 정치계의 존경을 받는 큰 어른으로 자리잡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문님은 이번에 민주당의 대선 후보 국민 경선 때에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서 진두지휘하셨고, 이른바 여덟번째 후보라는 별명을 스스로 붙이며 개표 결과 발표를 맡아 국민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습니다. 가히 하늘을 뒤덮을 만한 인기를 고문님은 이번 경선을 통해 얻으셨습니다.
전 국민선거인단에 신청했다가 추첨에서 탈락되어 아깝게 투표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개표방송만큼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보았습니다. 벗겨진 이마와 부리부리한 두 눈, 마치 호랑이를 연상하는 얼굴을 한 고문님은 단연 이번 국민 경선의 인기 정치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아내와 두 아이랑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개표방송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가슴 떨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김 고문님의 입만 쳐다봤습니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국민들이 고문님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고문님의 개표 결과 발표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전 서울에 가서 개표결과를 발표하는 고문님의 모습을 직접 봤습니다. 단상과는 거리가 먼 곳에 앉아 있었기에 얼굴을 직접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대형 전광판을 통해 고문님의 얼굴을 크게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텔레비전에서만 뵈었는데 직접 와서 뵙게 되니 꿈만 같았습니다. 저에겐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습니다.
김영배 상임고문님, 정말로 큰 일을 하셨습니다. 국민 경선을 대축제 속에서 멋지게 잘 마무리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쁘셨습니까. 얼마나 뿌듯한 기분을 느끼셨습니까. 금상첨화로 경선이 열기가 더해갈수록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이회창 후보보다 지지도가 훨씬 높아졌고, 그로 인해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도 덩달아 올라가 사상 처음 한나라당을 앞질렀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습니까.
경선이 진행되면서 저의 집 자식놈들은 한 가지 재미있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김 고문님의 경선 결과 발표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필통을 들고 마이크라고 하며 후보 이름을 부르고 득표수를 말하고 득표율을 발표하는 것을 흉내내는 아이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 솔직히 말하면 김 고문님의 발표를 여러 번 들으면서 어렸을 때에 들었던 레슬링 경기의 링 아나운서가 생각났습니다. 김일 선수가 경기할 때에 특히 많이 들었습니다. 양 선수를 멋들어진 목소리로 관중을 휘어잡으며 소개하는 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민주당에서 개표 발표자를 심사숙고하여 김 고문님을 적임자로 잘 뽑았다고 속으로 감탄하며 듣곤 했습니다.
그렇게 김 고문님은 올해 들어 민주당 최고최대의 행사인 국민 경선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한 1등공신이십니다. 이에 대해선 그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국민 경선 선거관리위원장 자리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입니까. 바로 경선이 공정하게 잘 진행되도록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최고의 자리가 아닙니까. 고문님이 계셨기에 16부작 주말 드라마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정치에 새로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맑고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민주당의 큰 어른 가운데 한 분이요, 지난 국민 경선의 선거관리위원장과 개표결과를 맡아 온 국민들에게 정치의 청량제 역할을 담당하셨던 김영배 상임고문님이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데에 앞장서셨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런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현주소입니까?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바로 그 심정입니다. 김 고문님, 정치란 그런 것입니까? 제가 너무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놈이기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가요? 노무현 후보로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니까 필승을 거두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노 후보가 먼저 사퇴를 하고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입니까?
김영배 상임고문님, 전 평범한 시민이므로 평범한 상식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평범한 상식이 얼마만큼이나 이 땅의 정치를 맡은 사람들이 수긍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당이 두 달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국민 경선을 하였습니다. 투표를 신청한 선거인단이 놀랍게도 2백만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당 관계자들도 국민들의 그와 같은 관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지요. 그래서 후보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이 뽑아준 정통성 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입니다.
국민들의 귀중한 한 표 한 표가 모여서 뽑힌 그 후보를 위해서 다음에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지지율을 높여 당선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지율은 올라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 국민 경선이 끝난 때로부터는 대선이 8개월 정도, 지금부터는 4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그 동안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후보를 사퇴해야 되는 결정적인 사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할 때에 지지율이 떨어지면 교체한다고 선거인단과 약속했습니까? 선거인단과는 뽑힌 후보에 대해 직접 말로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한다고 약속했습니까?
그 약속은 틀림없이 이런 내용이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 많은 국민들이 이렇게 좋은 후보를 선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민주당 당원 모두 여러분들의 귀한 뜻을 받들어 후보를 중심으로 열심히 뛰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며 오는 12월 대선에서 꼭 승리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지지율이 올라가면 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국민들 곁에 다가가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우리 당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더 많이 돌아다니겠습니다.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는 12월 대선 때까지 여러분이 뽑아준 후보와 일치단결하여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아닙니까?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신당 출현과 노무현 후보 선 사퇴 반대 입장에 서서 국민들과의 약속을 생각한 것일까요? 이것이 아니라면 뭐라고 선거인단과 약속을 했을까요? 그것이 저는 몹시 궁금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선거인단이 그럴 것입니다.
김영배 상임고문님, 이상으로 저의 평범한 상식을 고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오랫동안 정치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대원로이신 고문님께 너무 버릇없이 말씀을 올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그러나 고문님, 이 땅의 평범한 상식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지금 고문님의 행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있습니다.
김 고문님, 요즈음 들어 민주당 상황이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노무현 후보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잘못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민주당 내부에도 잘못이 많이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후 누가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하였습니까? 누가 선거인단과의 말없이 주고받은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애썼습니까? 국민 경선 때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던 김 고문님은 노 후보 당선 이후에 어떤 도움을 그에게 주었습니까?
김 고문님,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지지도가 높았을 때 옆에서 칭찬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은 지지도가 떨어졌을 때에 힘을 북돋워주고 격려하고 옆에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어주는 마음을 갖는 것과 몸으로 보이는 실천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평범한 상식으로는 국민 경선의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누구보다도 그 경선의 취지와 정치적 의미를 알고 계실 김 고문님께서 이 어려운 일을 맡아 해나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 후보를 반대하는 신당 세력의 선봉장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김영배 상임고문님,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제 가슴 속에 그래도 좋은 인상을 주었던 한 정치인을 향해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이 땅의 정치 현실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백범 김구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분의 '백범일지'를 두세 번 읽고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쓰신 붓글씨 가운데 조선시대의 고승이자 의병 활동을 하신 서산대사의 선시가 있습니다. 제가 참으로 본받고 싶은 내용이기에 원문과 풀이한 것을 그대로 적어봅니다.
踏雪野中去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수작후인정)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함부로 난삽하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
(1948년 봄 백범의 남북화합 주장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큰 정신적 전환점이었다. 이 대전환으로 정치적 몰락을 우려했던 측근들에게 백범은 담담하게 서산대사의 선시를 남겼다. 1948년 10월에 쓴 붓글씨이다.)
두서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글을 여기에서 맺겠습니다. 비록 이름 없는 평범한 시민이 드린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이 참담한 심정으로 김 고문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우리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더욱 힘써주시기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2년 8월 7일 밤에 이 땅의 이름 없는 평범한 시민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