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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순 할머니의 돋보기와 연습장. 또박또박 정성들여 수학문제를 옮겨놓았다.
김정순 할머니의 돋보기와 연습장. 또박또박 정성들여 수학문제를 옮겨놓았다. ⓒ 조경국
일흔두살의 나이로 최고령 검정고시 합격자가 된 김정순 할머니.
일흔두살의 나이로 최고령 검정고시 합격자가 된 김정순 할머니. ⓒ 조경국
"영어가 힘들고 수학이 젤 쉽지. 열심히 하는데도 영어는 점수가 오르지 않아. 수학은 재미가 있어. 셈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하는 것이고, 선생님도 잘한다 잘한다 격려를 해주니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더란 말이야."

올해 일흔두살, 김정순 할머니(전남 순천)는 꿈을 이뤘다. 지난 8월 2일 치러진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김할머니는 검정고시 합격증을 보이며 평생 가슴에 맺혔던 못 배운 한을 이제야 풀었다며 기뻐했다.

책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는 김할머니는 이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이다. 교직에 몸담고 있던 남편과 네 아들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내고 다시 공부할 수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제는 내친 김에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모까지 써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국민학교 졸업 때 통곡을 했었지. 얼마나 서러웠는지"

고졸검정고시 합격증.
고졸검정고시 합격증. ⓒ 조경국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잘있거라~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었지. 정말 통곡을 했었어. 그때가 1946년이었는데 당시야 누가 여자를 공부시키나. 국민학교 졸업할 때 여자애들은 4명밖에 없었어.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니 그럴 수밖에."

1946년 광양 봉강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 당시 여자가 중학교에 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고 그나마 초등학교까지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였단다. 56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슬픔의 눈물을 어제(27일) 열렸던 학원 수료식에서 기쁨의 눈물로 모두 쏟아 버렸다.

1년간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3년 동안 김할머니는 '신명'나게 공부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오전에 집안 일 마무리하고, 학원으로 향하는 시간은 오후 2시, 4시 30분까지 수업을 듣고, 저녁상 차려놓고 7시에 다시 학원 가서 9시30분까지 하루 5시간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김할머니는 학원을 다니는 동안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필통 속에 들어있던 안정숙 할머니 합격 기사.
할머니의 필통 속에 들어있던 안정숙 할머니 합격 기사. ⓒ 조경국
학원 공부로도 모자라 잠자기 전까지 3시간은 더 책과 씨름하면서 할머니가 얻어낸 결론은 "열심히 하면 뭐든 할 수 있지"라는 것이었다. 허름한 밥상(?)같은 책상 위에 놓인 연습장과 문제집, 그리고 뿔테 돋보기에 할머니의 끈기가 배어있다.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어찌 있는지 몰라."

"고입검정고시만 합격하고 그만두라 했지. 중학교 과정도 힘들텐데 고등학교 과정을 어떻게 따라갈까 싶어 걱정했었어. 참 열심히 공부하더라고. 우리 나이는 한시간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든데 밤늦도록 세시간 넘게 꼿꼿하게 공부를 하니."

큰 아들 김선규(48)씨의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할머니.
큰 아들 김선규(48)씨의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할머니. ⓒ 조경국
할머니의 합격을 누구보다 기뻐한 남편 김동희(72)옹은 할머니가 건강을 해칠까봐 공부하는 것을 말렸단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집은 할아버지도 꺾을 수 없었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든 끝장(?)을 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는 할머니의 평범한(?) 공부방법이 결코 평범치 않게 들린다.

김할머니는 필통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안정숙 할머니(1999년 당시 72세)의 고졸 검정고시 합격 신문기사 조각을 꺼냈다. 몸이 아프고 눈이 침침해도 이 기사를 보며 '나도 할 수 있다'고 자신을 가졌단다.

큰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쓰며 공부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다시 갖게 된 할머니의 목표는 자신이 직접 학사모를 쓰고 졸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꿈은 이제 반만 이루어진 셈이다.

"공부란 때가 있어. 그걸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를 해"

200여명의 학원생 중에서 가장 고령이었던 할머니는 함께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던 40대 50대 친구들(?)도 이번 시험에 모두 합격을 했다며 기뻐했다. 한창 배울 나이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던 어른들에게는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나이와는 상관없이 모두 노력파가 된단다.

4년 동안 하루 세시간 씩 공부를 했던 책상. 책상 밑에는 참고서와 사전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4년 동안 하루 세시간 씩 공부를 했던 책상. 책상 밑에는 참고서와 사전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 조경국
"공부란 때가 있어. 나처럼 나이 들고 공부하려면 힘들지. 공부도 젊었을 때 해야 하는 거야. 그걸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를 하게 되지. 학원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많았어. 모두들 공부 못한 '한'을 안고 살아가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배울 때 배워야지라고 이야길 해도 젊은이들은 그걸 몰라."

하지만 김할머니는 때를 놓쳤다고 깨닫는 순간부터라도 열심히 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며 무엇이든 시작할 때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이제 고졸검정고시라는 큰 고개를 넘은 할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시험 준비하느라 예전보다 나빠진 건강이다. 잠시라도 책을 놓으면 금방 잊어버려 대학에 가려면 꾸준히 공부를 해야하는데 건강을 추스르는 것이 더 급한 일이 돼 버렸다. 하지만 할머니의 노력과 열정이라면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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