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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아침에 쓴 가을 엽서
10월 23일 아침에 쓴 가을 엽서 ⓒ 이선애
가을이 남녘 땅에도 깊어간다. 학교 주변의 나무들도 이제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작은 풀잎부터 붉은 색, 자주 색, 노란 색으로 저 마다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침의 차고 습한 안개에 싸여 이제는 그 빛을 잃어 가는 풀들은 마치 칼바람에 내쫓겨야하는 철거민 같다.

추위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듯 자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뿌리를 튼튼하게 내린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는 가장자리부터 예쁘고 곱게 물든 단풍으로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하지만 말라비틀어져 가는 가을 풀은 그 모습이 초라해 안타깝다.

문학소녀처럼 조금은 철없던 내가 길가의 마른 풀을 보면서 도시 빈민가를 떠올리는지... 어쩌면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도... 이런 무성한 생각을 하면서 책상에 앉아 엽서 한 장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가을 엽서를 보내기 위해서이다. 지은이와 성재에게 엽서를 썼다.

성재에게

투명한 하늘빛이 점점 높아만 가는 계절이구나.
'금산제'에 발표한 춤연습 때문에 많이 힘들지? 그래도 선생님은 열심히 노력하는 성재의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성재 춤은 우리 학교 최고!)

성재야, 풍요로운 계절 가을엔 책을 읽어서 네 마음의 뜰을 채우지 않으렴. 너 저번에 컴퓨터로 글쓰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더니, 요즘도 쓰니? 컴퓨터랑 너무 친하지만 말고, 가끔은 종이로 된 책도 읽어보렴. 그리고 집에서 할머니 일도 좀 도와드려라. 잘 할 것이라 선생님은 믿는단다. 성재야, 올 가을이 성재에게 좋은 시간이 되길 선생님이 기도하마. 총총


노오란 낙엽이 달린 나무를 그린 엽서에 만년필로 꼼꼼하게 써서 연하게 색칠을 하고 코팅지로 그 위에 붙였다.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엽서로 보내면 아이들은 무척 좋아한다. 매일 끝번부터 쓰면 우리반 25명을 다 쓰는데 한 달 가까이 걸린다. 순서가 늦어지는 아이들은 나에게 항의도 하면서 선생님의 엽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좋다.

올해 담임은 참 힘들다. 특히 지난 여름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은 많이 아프고 상했다. 우리 반의 3분의 1은 흔히 말하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이다. 부모님이 같이 계시지 않고 할머니가 보호하는 아이들도 많다. 유난히 드센 여학생들은 또 나를 내내 우울하고 힘들게 했다. 지난 여름부터 많은 말썽을 피워서 벌써 몇 번의 담임의견서를 썼다. 무능력한 선생인 내가 너무 속상했다. 어떤 날은 도서실 구석에서 눈물은 흘렸다.

가을이 깊어진다. 상한 내 마음 밭에도 어느새 새살이 차 있다. 그리고 매일 야단만 치던 내가 미안하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을 믿으며 저 아이들의 생각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엽서를 쓴다. 사랑의 마음을 우수수 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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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의령군 지정면의 전교생 삼십 명 내외의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 이선애입니다. 맑고 순수한 아이들 눈 속에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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