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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에 억새풀이 바람에 물결치고 있다
하늘공원에 억새풀이 바람에 물결치고 있다 ⓒ 장흥배

내 고향은 남도의 섬마을. 엄마들은 생각지 못한 이웃의 호의에 고마움을 표시할 때 십중팔구 '아심찮이'라는 말을 썼다. 예를 들어 제사를 지낸 다음날 고만고만한 양의 떡과 과일을 이웃에 돌리면, 이웃집 엄마들은 "하이고 뭘 이런 걸 아심찮이 가져오고…" 라고 했다.

지그재그로 연결된 나무계단을 오르고, 서대문구와 마포구의 도심,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아래 흐르는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책로를 지나 하늘공원에 이르렀을 때, 들은 지 너무 오래돼 잊어버린 그 말이 살아났다.

"참, 아심찮이도 자랐구나."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사람 키를 훌쩍 넘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억새풀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줄 때도 받을 것을, 받을 때도 갚을 것을 셈하는 데 익숙해진 서울 생활 10여년. 고마움을 표시하는 말이라고 이 계산의 문화에 절지 않았으랴. 그러나 무심결에 튀어나온 고향 엄마들의 언어는 난지도 쓰레기 더미 위에 피어난 억새꽃의 생명력을 닮아 있었다.

계산 없는 주고받음에만 어울렸던 그 말이 내 안 어딘가에 죽지 않고 있다가, 불모지 위에서 넘실대는 억새풀의 인사를 받아 살아난 것이다.

하늘공원의 도로변에는 들꽃이 아직 피어 있다
하늘공원의 도로변에는 들꽃이 아직 피어 있다 ⓒ 장흥배

하늘공원의 억새풀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알지도, 요구하지도 못했던 앞선 세대의 실수를 말없이 보듬어 감춰주고 있었다. 산책로 옆에 걸린 옛 난지도의 사진만이 다른 생명을 무시하며 달려온 인간의 욕망을 경고할 뿐.

눈에 보이는 미감에만 의존해 단풍이 들지 않는 아카시아 나무와 넝쿨과의 식물들만 무성한 산 중턱에서 느낀 실망도 이내 가셨다. 험악한 땅일수록 가장 강인한 식물부터 자리를 잡아 흙을 정화시키고 다음 식물에게도 자리를 내주는 것이라고 억새풀은 잔잔히 타이른다. 쓰레기 더미 위에 불과 1M 정도의 흙을 덮어준 대가로 사람들은 카메라 가득 추억을 퍼담고 있었다.

억새풀이 하늘공원의 메인이라면 도로변에 피어있는 개망초를 비롯한 갖가지 꽃들은 디저트다. 이 꽃들은 11월이 오면 질 것 같다. 그러나 하얀 눈이 몇 번 땅을 덮을 겨울이 지나면 하늘공원은 내게 더 아심찮은 봄을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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