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로 첫 옥고. 69년 조태일 시인이 주도하던 <시인>지에 '황톳길'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70년 담시 '오적(五賊)'을 써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 74년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종혐의로 사형 선고. 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주는 '로터스상' 수상. 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 수상. 이후 생명운동과 율려운동 펼침. 현재 명지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
간단한 위의 이력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모를 사람은 한국에 없다.
김지하(61). 우리 기억 속의 김지하는 무더운 여름에도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던 박정희 유신정권 때 '또 다른 정부(政府)'로 불리며 저항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줬던 민주투사 혹은, 무너져가던 한국의 전통정서를 부활시켜 탁월한 목청의 절절한 노래를 들려줬던 시인으로서의 모습이다.
'투사'와 '시인'. 그러나, 김지하가 이 두 단어로만 설명이 가능한 사람일까? 이 의문이 몇몇 사람의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근 세상의 빛을 본 <김지하 전집>(실천문학사)은 투사와 시인으로서의 김지하가 아닌 철학자이자 미학자이기도 한 김지하의 또 다른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책의 출판을 결정한 실천문학사의 김영현 대표는 말한다. "김지하라는 이름 뒤에 붙는 시인이라는 호칭 속에는 단지 시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중층의 의미가 겹쳐있다"고.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책 3권으로 묶인 <김지하 전집>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김지하의 글 중 철학과 미학,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글만을 샅샅이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1권에는 '철학사상' 2권에는 '사회사상' 3권에는 '미학사상'이라는 부제도 달았다. "독자적인 문화·사상가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독특한 입지를 가지며 문학 안팎을 넘나드는 김지하의 철학과 미학의 성과를 제대로 평가해보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는 작업"이라는 것이 출간을 결정한 '김지하전집 발간편집위원회'의 설명.
| | "인민군노래 같아서 게재할 수 없다" | | | 시인 이승철이 대폭 수정·정리한 김지하 연보를 보면... | | | |
| | | ▲ 지난해 가을 경기도 일산의 한 음식점에서 후배작가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지하 시인. | ⓒ홍성식 | 1966년 김지하가 스물 다섯이던 시절. 친구인 조동일(문학평론가)이 김지하가 쓴 '황톳길' '육십령' 등 6편의 시를 <창작과비평>을 발행하던 백낙청(문학평론가)에게 신인 투고작 형식으로 건네준다.
이 시들을 검토한 김수영(68년 타계) 시인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게재 불가다. 이건 시가 아니라, 인민군 노래 같다."
시인 이승철(44)이 대폭 수정하고, 재정리해 책 뒤에 실은 '김지하 연보'를 읽다보면 위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재밌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승철은 이번 연보작업을 위해 3개월 이상의 시간을 투자했다. 기존에 나와있던 연보들을 검토해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고, 여러 차례 김지하와 직접 만나 이야기 듣는 것은 물론,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국립도서관을 오가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연보에는 김지하가 처음 시를 쓰게된 계기가 목포중학교 1학년 때 유달산의 한 공중변소에서 발견한 충격적인 낙서 때문이라는 것, 영화감독 하길종이 미국 유학 당시 김지하와 동학혁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스물 아홉 청년 김지하의 첫 직업이 코리아마케팅이란 회사의 카피라이터였다는 것, 1974년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종혐의로 대흑산도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지하의 신분은 영화 <청녀(靑女)>의 조감독이었다는 사실, 겨우 34세의 나이에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작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노벨문학상과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것 등이 모두 기록돼 있다.
91년 분신정국 당시 발표된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편집과정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제목이 바뀜-라는 김지하의 기고문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12일 후인 5월17일 같은 신문에 '다수의 침묵, 그 의미를 알라'는 제목의 글이 발표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보에는 강경대를 쇠파이프로 죽인 정부와 백골단의 폭력을 비판하고, 생명의 소중함과 반(反)분신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역설한 17일자 기고문에 관한 사항도 가감 없이 실려있다.
모두 48페이지에 이르는 연보에는 김지하의 가족사도 상세하게 언급된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사상을 접했던 부친 김맹모가 해방 직전 '조선해방 게릴라운동'에 참여했다는 것, 증조부인 김영배는 갑오동학혁명 당시 대표적 급진개혁파인 김인배 영호대접주와 함께 활동한 동학혁명의 지도부였다는 것 등을 볼 때 김지하의 반골 혹은, 반체제 기질은 혈통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 홍성식 기자 | | | | |
사상가로서의 김지하를 조망하고 있는 <김지하 전집>
방대한 분량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관념과 실체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가늠키 어려운 김지하의 깊이 탓에 책은 소설처럼 쉬이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보면 득안(得眼)한 노시인이 어떤 잣대와 기준으로 세상을 읽어내 왔는지 발견하는 기쁨을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다.
김지하 역시 "나는 무슨 거창한 의미의 사상가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기초적인 담론에 불과하다"는 말로 <김지하 전집>이 교육이나 훈화가 아닌, 동시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위해 묶여졌음을 강조한다.
1권 '철학사상'에는 동학과 율려, 전통사상을 담았다. 가계의 혈통과도 무관하지 않은 동학사상은 김지하 철학의 시발점. 그러기에 1권의 절반 이상 분량을 여기에 할애했다. 80년대 출옥 후 관심의 대상이었던 '생명사상'과 김지하의 90년대를 대변하는 '율려' 역시 1권에 함께 묶였다.
'사회사상'이라 이름 붙인 2권에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글들이 배치됐다. 스물 넷의 새파란 김지하를 캄캄한 감옥으로 보낸 글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와 민청학련사건 당시 쓴 법정 최후진술문 '나는 무죄이다'도 2권에 실렸다.
3권 '미학사상'에서는 김지하의 예술론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도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70년대 초반의 전설적인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비롯,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흰 그늘의 길' 등을 통해 김지하의 문학적·미학적 심미안을 확인하는 것은 시대에 관계없이 의미로운 일일 듯하다. 청년 김지하의 일기도 3권에서 만날 수 있다.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이라 시작되는 김지하의 시 '황톳길'은 70년대 내내 독재의 어둠 속을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대변했다. 그리고, 2002년. <김지하 전집>이 들려주는 노시인 아니, 노철학자의 사상편력을 21세기의 청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