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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등록 1주일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를 위한다고 작심하고 들이민 카드가 오히려 선거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20일 중앙선관위가 대통령후보를 찬성 지지하는 사조직을 금지한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 방지법 제 89조 2항을 근거로 창사모, 노사모, 정사모 등 유력후보들의 사조직을 폐쇄하는 조치를 발표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신문들은 일제히 조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지지하는 사설을 실었다. 반면 네티즌을 포함한 일부 국민들은 이 조치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조치가 발표된 이후 선관위 사이트는 항의자의 글이 폭주하고 있다. 산악회처럼 대중동원형인 선거조직은 심각한 반발을 보이지 않는 반면 인터넷에 기반한 자생적인 조직들이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다.

선관위가 모든 유력 대선후보의 사조직을 해체하라는 지시를 2002년에 내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87년, 92년, 97년 대선을 되돌아보면, '돈먹는 하마', 또는 '돈이 들어가야 움직이는 공중전화식 대중조직'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사조직의 전성시대였다. 선거가 끝나면, OO본부는 몇 천억원을 썼다는 둥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데 지난 5년 사이 우리나라의 정치환경에 획기적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를 촉발한 곳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을 비롯한 자발적인 팬클럽 조직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돈을 들여서 투명하고 깨끗하게 자신의 지지자를 선전하고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한국 정치도 선진국형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초가 나온 것이다.

2002년 대선은 돈 문제에 관한 한 큰 스캔들이 없다. 예전 이맘때면 수많은 가두집회, 직능모임 등을 통해 천문학적 돈이 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당에서도 몇 천억원의 돈을 동원하고 있다는 조짐은 없다.

분명히 과거와 비교하면 진일보한 장면이다. 여기서 선관위가 할 일은 금권선거 양상이 나오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돈 안드는 선거를 더욱 고무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되는 것은 구형 조직과 신형 조직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 데서 나왔다. 금권선거를 유혹하는 사조직은 척결해야 하는 반면,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를 더욱 북돋울 수 있는 양면의 고려를 해야 하는데 무차별적인 해체지시가 나왔기 때문에 뜻있는 시민들이 반발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대역행적인 조치가 나왔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이번에 적용한 조항도 시대의 새로운 발전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과 충돌이 생긴 것이다. 모든 공무원 조직이 그러하듯이 선관위도 법률의 보수적 해석과 적용을 중심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선관위도 불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법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법을 개정해야 하는 책임은 국회와 정당에 있는 게 아니냐'라는 반발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동의한다. 물론 선관위가 오늘의 모순을 막기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최선을 다했는가는 별도로 평가해 볼 일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정치권에 있다.

시간이 없다. 정치권, 정당이 서둘러야 한다. 필요하다면, 각당 대표회담이든 후보회담이든 선거법 협상을 타결 지어야 한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선거법 협상은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결국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5년 전의 구법으로 이번 선거를 그대로 치르게 된 것이다. 지난 5년 사이 인터넷의 발전을 되돌아 보라. 그런데 이번 선거도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진 법으로 치르게 된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한나라당은 단순 과반수를 훨씬 넘기고 절대 과반수(상임위원장을 빼도 과반수가 되는 의석수)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법개정에 관한 한 전적으로 한나라당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도 쿠데타를 하자는 당이 아니고 선거로 정권을 잡자는 정당이기 때문에 필자도 뭔가 한나라당을 칭찬할 만한 꺼리가 없나 찾아보았지만, 칭찬꺼리가 없다. 선거와 정치를 개혁하는, 뭔가 실적을 올린 게 있어야 하는데, 지독히도 한 게 없다.

혹시 당파적 득실계산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자신들의 조직은 공조직에 흡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자생적인 노사모 같은 조직은 한나라당에 백해무익하니까 그냥 없애버리자는 식으로.

그러나 이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다. 인터넷상의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것을 민주주의 발전과정의 진통으로 해석하고 보완장치를 만들면 될 것이다.

정치권, 그 중에서도 다수당의 무사안일로 빚어진 일에 대해 그것 고소하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유력 일간지의 논조에도 문제가 있다. 그동안 그들이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질타하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선진국형 정치를 얼마나 강조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 봐라, 법은 법이니까 무조건 따라야지'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도 무책임하다. 특히나 그동안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비방으로 인식하는 피해의식을 넌지시 내보이는 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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