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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이 29일 오후 수원 영동시장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거리 유세장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자서전 중 일부를 인용하며 노 후보를 공격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www.npil.org, 수원 팔달)이 29일 오후 수원 유세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자서전에서 자신의 그릇된 여성관을 참회하며 공개한 대목을 거두절미하고 소개해 악의적인 인신공격이 아니냐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 대변인은 이날 오후 4시20분 수원 영동시장에서 열린 지원 유세에서 노 후보의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이하 '여보')의 내용을 일부 인용, 다음과 같이 노 후보를 공격했다.


저질공세 시작되나?/ 김정훈 PD

다음은 남 대변인의 발언 전문.

"제가 오늘 노무현 후보가 쓴 자서전을 한 번 읽어봤습니다. 여기 한 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1994년도에 '여보, 나좀 도와줘'라는 책에 쓴 내용입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이렇게 써 있습니다.

또 같은 저서 126쪽을 보면 사법연수원 동료들에게 아내를 다루는 법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거 노무현 후보가 쓴 겁니다. 뭐라고 썼는지 읽어드리겠습니다.

'조져야 돼. (청중 웃음) 밥상 좀 들어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버리고 이불을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자격 있습니까? 자기 책에 써놓고 또 문제되면 싹 말을 바꾸겠죠. 그렇지만, 이번엔 안될 겁니다. 왜? 자기 책에 자기 입으로 자기 부인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 대통령될 자격 있습니까, 여러분? 그래놓고 또 아내를 위해서라면 대통령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짓말도 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노무현 후보를 심판해야 합니다."


남 대변인의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유세장에 모인 2천여 명의 한나라당 지지자들과 시민들은 "어머, 어머" "세상에 저럴 수가" 등의 반응을 보였다.

▲ 수원 영동시장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거리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이 이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조윤선 선대위 대변인도 남 대변인의 발언에 이어 성명을 내 "노 후보의 여성관이 무엇인지 묻는다. 노 후보는 얼마나 자주 부인을 때렸느냐? 요즘도 부인을 때리느냐?"며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 후보는 가면을 벗으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들은 노 후보가 "나의 과거는 이랬지만, 지금은 참회하고 다른 사람이 됐다"는 취지로 소개한 내용을 마치 노 후보의 평소 여성관이 이렇다는 식으로 곡해될 수 있어 악의적인 인신공격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남 대변인이 언급한 '노 후보의 여성관'은 '여보' 125∼126쪽에 나와있다. 남 대변인은 노 후보의 퇴행적인 여성관을 공격하며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나? 이것이 문제가 되면 노 후보는 또 말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한 것은 노 후보가 이미 말을, 아니 사고방식을 바꿨다는 것이다.

노 후보의 손찌검과 관련된 원문은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로서 매우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이었을 것이다"로 되어있다.

노 후보는 자서전에서 "자라나는 동안 '칠거지악' '여자의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여자와 명태는 두들겨야 한다' 등의 말을 많이 들어왔고, 여성을 장식물쯤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내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남경필 대변인.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젊은 시절의 노 후보는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있었는데, 지금의 부인과 연애 끝에 결혼하고 보니 자신이 말을 명령조나 억압조로 하면 부인이 그걸 따지고 들고, 심하면 집의 가풍, 개인의 습관을 비난하기도 했다는 것.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던 신혼초기에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는 게 노 후보가 아내에게 손찌검한 내막이었다.

노 후보의 이 같은 사고방식은 고시 합격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 갓 결혼한 동료들이 '아내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비결'을 물으면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 후보는 "사회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자서전에게 적고 있다.

노 후보에 따르면, 83년경 부산에서 만난 운동권 청년들에게도 여성을 비하하는 농담을 했는데, 청년들은 "변호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펄쩍 뛰어 무안을 당했다는 것.

청년들은 노 후보의 아내에게 여성문제를 다룬 '하늘의 절반'이라는 책을 읽도록 권유했고, 노 후보도 그 책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 후보는 자서전에서 "이후 나와 아내 사이도 달라졌고, 아내를 존경할 줄 알게 됐다"며 자신의 바뀐 여성관을 설명하고 있다.

남 대변인의 발언은 노 후보가 "과거의 나는 이랬지만, 지금은 반성하고 다른 사람이 됐다"는 참회 부분을 애써 외면하고 과오만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악의적인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한나라당을 '심판'?
'이회창 대통령' 울려 퍼진 수원 유세장

▲ 이 후보가 29일 수원 유세장에 입장하던 도중 사다리에 올라가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29일 오후 4시20분 이회창 후보 유세가 열린 수원 영동시장에는 2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이 후보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수원은 3개 지역구(장안구, 권선구, 팔달구) 국회의원이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 이회창 후보와 함께 연단에 오른 김덕룡 선대위 공동의장은 유세장에 몰려든 시민들을 보고 연신 "많이 모였네, 많이 모였어"라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연단 앞에 있던 시민들은 사전행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나선 사회자의 '이회창 대통령' 연호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원 장안구가 지역구인 박종희 대표비서실장도 연단에 올랐다.

박 비서실장은 시민들을 향해 "우리는 오늘 누구를 지지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까"라고 물었고, 연단 앞에 있던 시민들은 "이회창"이라고 크게 대답했다. 박 비서실장은 다시 "우리는 12월 19일 누구를 심판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유세장 분위기에 압도돼서인지 "한나라당"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당황한 박 비서실장은 재차 큰 목소리로 같은 질문을 던졌고, 시민들의 절반은 "민주당"이라고 했지만 절반은 여전히 "한나라당"이라고 답했다. 박 비서실장이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고 나서야 시민들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민주당"이라고 한 목소리로 답했다. / 최경준 기자

"칠거지악의 여성관...사회운동하며 바꿨다"
노무현 자서전에 나타난 여성관의 과거와 현재

▲ 94년 발매된 노무현의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의 표지
노 후보가 자신의 달라진 여성관의 과거와 현재를 밝힌 자서전(www.knowhow.or.kr/roh/book/book2.asp)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장 여보, 나좀 도와줘 - 제2절 하늘의 절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안되었을 무렵, 그러니깐 아내인 양숙이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마침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나는 마찬가지로 설을 쇠러 내려온 양숙이와 둑길에서 마주쳤다. 나는 대뜸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 통샘골에서 좀 보재이."

양숙이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씩 웃기만 하더니 그냥 가 버렸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약속된 장소로 나간 나는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는 양숙이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씩씩대면서 헐레벌떡 양숙이네 집으로 달려간 나는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댓돌 밑에 서서 큰 소리로 양숙이를 불렀다.

양숙이의 어머님, 그러니깐 지금 나의 장모님께서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깜작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안녕하십니까?"하고 능청을 떨었다.
"니는 와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노?"
양숙이는 내 신경을 더 거슬렸다가는 자칫하다 동네 망신이 될 것 같아서였는지, 순순히 나를 따라 집 밖으로 나섰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도 않고 걸어갔다.

그러다 둑길에 올라서자 양숙이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니 요새 공부한다면서?"
"응."

대답을 해 놓고도 그걸 왜 묻는가 싶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양숙이가 또다시 가시 돋친 말을 던져 왔다.
"공부하면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사람은 와 불러내노?"
"집을 지으려면 기둥이나 대들보도 필요하지만 서까래나 장식물들도 필요한 거 아니가?"
"그럼 여자는 서까래나 장식물 같은 사람이란 말이가?"

순간 나는 '아차, 말을 잘못 했구나'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꺼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은 정말 실수였을까, 아니면 내 사고방식이 실제로 그랬던 것일까? 분명하게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와서 보면 후자 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칠거지악.
여자의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여자와 명태는 두들겨야 한다. 새댁은 청치마 밑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자라나는 동안 많이 들어 왔던 이야기들이다. 남성 중심 사회를 상징해 주고 있는 이 말들을 사흘이 멀다 하고 들으면서 자라났던 만큼, 여성을 장식물쯤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내 머리 속에 자리잡았음직하다.

그러나 나의 여성관에는 단순히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런 얘기들을 함께 들으면서 자라났던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여성관에는 일종의 '반감'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구박 하셨다. 어머니께 죄송스럽긴 하지만, 그건 '구박'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 그러나 수완은 없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성실한 농사꾼이셨다. 젊은 시절 객지에 나가 큰돈을 벌어 오셨지만 몽땅 사기 당하고 말았다. 또 친척들 간의 금전 거래에도 악착스러운 면이 없었던 탓에 집안 살림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헐값에 넘겨 버리는 일이 적지 않았었다. 가지고 있던 작은 공장과 논밭들이 그런 식으로 헐값에 친척들에게 넘겨졌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한이 맺혔던지 어머니는 늘상 아버지를 구박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심어졌던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여성이라는 이미지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다가왔지만, 아내로서의 여성은 잔인하리 만큼 야박하고 극성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나의 그런 여성관은 그 후 큰형수님이 새 식구가 되어 우리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굳어졌다.

대학을 다니다 말고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갔던 큰형님은, 국민학교 여선생인 형수를 만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형님 생각에는 형수가 직장이 있으니 고시 공부 뒷바라지를 해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 형님은 결혼 후 고시 공부를 중단했다. 형수의 구박과 괄시 때문에 공부를 더 계속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형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형님과 형수 사이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내 눈에는 형수님이 형님을 일방적으로 구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나는 형님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마누라만은 손아귀에 넣고 살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 왔던 나의 각오는 막상 연애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봄날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말았다. 20대 남녀 사이의 사랑이 가진 위력은 대단했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경계심과 혐오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저 양숙이가 좋게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할 때까지도 남성 우위의 생각이나 여성에 대한 경계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양숙이만 '특별히 좋은' 여자이거나 '순종하는' 또는 '내 손아귀에 들어 올'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 놓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말을 명령조나 억압조로 함부로 하면 그걸 따지고 들뿐만 아니라, 심하면 우리 집의 가풍을 비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 개인의 습관까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꺽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 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 형님처럼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로서 매우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우리 집은 농사가 많았다. 형님 내외는 직장 따라서 부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모 모시고 농사 수발을 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니 아이 키우랴, 집 청소하랴 음식을 장만해서 들에 갖다 주랴, 그 고생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한답시고 모내기하는 날에도 내다보지도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연수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아내를 다루는(?) 일을 무척이나 힘들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연수원 동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친구들이 보기에는 나야말로 아내 위에 군림하는 남편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노 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 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다.

83년경,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 문제 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한 명은 함께 춤을 출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 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생각이 요즘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흉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청년들은 내 아내에게 '하늘의 절반'이라는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했다. 속 마음에는 아내를 운동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도 그 책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여성 문제에 대한 책이었다. 일반적인 여성 문제는 물론, 자녀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까지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실험적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상세한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여성의 소중함과 권리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그 이후 나는 그때까지 나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나와 아내 사이도 달라졌다. 나도 아내를 존경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실천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나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가 한결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변화를 읽는다. 이젠 싸움을 해본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운동권이 우리 집에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또 새로운 변화를 느낀다. 무슨 애기 끝에 남편이 음식도 '해 주고' 빨래도 '해준다'고 이야기 했더니, '해준다'는 생각이 틀렸단다. 남의 일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는 거란다. 어느 나라에서 남성 노동자에게 '육아 휴가'를 준다는 말을 듣고 별 싱거운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보니 요즘 말로 장난이 아니구나 싶다.

내가 변호사를 하고 있을 때만 해도 민법상 여성을 차별하는 법이 버젓이 있었다. 그런데 13대 국회에서 여러가지가 바뀌었다. 남녀 고용 평등법도 만들었다.

앞으로 남은 문제도 많고 또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제기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의 정치 진출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13대 국회에서 가족법 개정이나 남녀 고용 평등법, 영유아 보육법등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한 여성 의원들의 노력이 돋보이기도 했고, 요즈음 지방의회에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도 인상이 깊다. 특히 지방자치는 바로 여성들의 피부에 와 닿는 생활의 문제가 많아서 여성들의 진출이 더욱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성들의 정계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들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보면 비례대표제 또는 대선거구제를 채택하고 그 중 일부의 의석을 여성에게 배정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사회 진출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걱정이 있다. 사회 진출은 좋은데,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딸아이도 곧 부닥칠 문제이다. 여성의 취업 비율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육아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사회적 대책을 세워야만 할 때이다.

장성한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단다. 모두들 손주 키워 주기가 싫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떤 어머니가 "손주 맡기면 사위나 며느리 앞에서 아이 입을 걸레로 싹 닦아 주고, 음식을 입에 씹어서 먹이면 그 날로 아이를 데려간다."고 손주 보아주지 않을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더란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러나 웃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여성들이 좀 더 넓게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여성 문제는 여성의 권익 신장, 사회 진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회제도 전반에 관련을 갖는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어 온 역사를 보면 노동운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결국 여성 문제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 전반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의료 보장, 무상 교육, 국가에 의한 영유아의 보육 제도가 발전되지 않고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어렵고 여성의 사회 진출 없는 남녀평등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그 사회의 복지 제도에 관한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은 정말 형편없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의식도 너무 낮다. 그리고 그 문제의 개선을 주장하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도 냉담한 것 같다.

이에 여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도 여성의 권익,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진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환경, 소비자 문제, 교육, 의료, 노인 복지 등 사회보장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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