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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소 앞에 모인 참석자들
ⓒ 지리산생명연대
추위가 매서웠던 12일 오전 11시, 지리산 실상사에서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선이와 효순이 추모제가 열렸다.

생명공동체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이 지역의 실상사 사부대중과 (사)한생명, 지리산생명연대 등이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마음을 모아 추모제를 열게 된 것이다.

▲ 스님들의 간절한 기도
ⓒ 지리산생명연대
법당에서 스님들의 불교식 추모 예식이 시작되고, 주지스님인 도법 스님의 독경 소리가 오늘 따라 너무나 구슬프게 들렸다. 법당 앞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은 무거운 슬픔으로 함께 마음을 모았다.

"열네 살, 저 풀잎처럼 여린 것들/풀섶에서 뛰는 개구리나 메뚜리를 보고도 소름이 돋았을/새털같이 보드란 팔다리가/그 무시무시한 장갑차의 궤도에 짓이겨질 때, 저 아이들이 겪었을 아픔과 절망의 벼랑!"으로 시작된 발원문이 낭독되면서 곳곳에서는 참담한 슬픔과 분노로 가슴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아울러 한미주둔군 지위협정 개정과 전세계의 제국주의적 침탈전쟁의 거부와 언론의 사실보도를 요구하며 효순이와 미순이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 두 여학생과 같은 또래인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이 편지를 읽고 있다
ⓒ 지리산생명연대
▲ 이원규 시인이 추모시 '은하수'를 낭송하고 있다
ⓒ 지리산생명연대
이어 실상사 경내에 있는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미선이 효순이와 같은 또래인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의 편지글이 낭독되고, 이원규 시인이 추모시를 낭송했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정 앞에 헌화를 하고, 서명을 하고 성금을 모금하는 줄이 길게 이어지며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고요하고 단호한 이날의 침묵은 다시 한번 두 소녀의 죽음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모두의 다짐이었다.

▲ 살인미군 처벌과 소파 개정을 위한 서명 작업
ⓒ 지리산생명연대
▲ 영정이 있는 기도소에 헌화 행렬
ⓒ 지리산생명연대


실상사의 추모 발원문

고 심미선, 신효순, 두 소녀의 영가를 보내며
삼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우러러 고하고 발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한 찰나도 쉬지 않고 변합니다. 생겨난 것은 그 무엇이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하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어떤 생명은 태어나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혹은 바깥 세상 빛 한 줄기, 바람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딴 세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서로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 그것이 그나마 우리네 중생들의 슬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미 여섯 달이 지난 저기 저 미선, 효순 두 소녀의 황당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참담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열 네 살, 저 풀잎처럼 여린 것들
풀섶에서 뛰는 개구리나 메뚜기를 보고도 소름이 돋았을
새털 같이 보드란 팔다리가
파란 꿈과 사랑을 담은 심장과 뼈마디가
그 무시무시한 장갑차의 괘도에 짓이겨질 때,
이슬 냄새 나는 정갈한 머리카락 강철 나사못에 엉겨 뽑힐 때,
저 아이들이 겪었을 아픔과 절망의 벼랑!

아, 6월 13일 오전 11시, 그 대낮의 하얀 절망, 깜깜한 어둠을 상상하면, 대자대비 관세음 보살님! 당신의 그 온화한 미소보다 의로운 벼락칼의 응징을 빌고 싶어지는 이 중생심을 용서하소서! 대지 문수사리 보살님! 오늘은 왠지 당신의 명철한 지혜를 기리기 전에 얼음보다 차가운 저주가 혀끝에 맴돕니다.
우리의 이 분노는 비단 처참하게 바스러진 저들의 주검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한 사고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아직 붙어있는 이 목숨이 무겁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남에 나라 군대가 그 흉물스런 괴물들을 함부로 몰고 다니는 꼴을 눈뜨고 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직 무엇 하나 바로잡지 못하고 뭐 하나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 입으로 저 상처받은 넋들을 향해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말 차마 떼기 어렵습니다. 하오나, 오늘 이 법석을 채우신 제불 보살님, 경황도 없이 부서진 저들의 꿈과 놀란 가슴 쓸어주시고, 저들을 사랑했던 어르신들 동무들
에게도 안심을 주소서! 대성 인로왕보살님, 삼세 제불 보살님들의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으로 원망과 회한 씻어내어 더욱 정갈해진 미선이, 효순이의 영가 한없는 빛의 세계, 아미타 부처님의 불국토로 인도하소서!

미선아, 효순아 이제 이 세상일은 우리에게 두고, 부디 인로왕보살님 이끄시는 대로 맑디맑은 빛의 나라, 더 이상 태어남도 없어 죽음도 없는 나라, 톱니바퀴 갈리는 소리도 총도 없는 나라, 학교도 과외수업도 없는 나라, 주눅들 일도 뻐길 일도 없는 나라, 꾸지람도 칭찬도 따돌림도 없는 나라, 미워할 것도 매달릴 것도 없는 나라로 가거라! 너희들의 예쁜 이름 「미선」, 「효순」은 배달의 자존을 일깨우는 수호천사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법석에 강림하신 제불 보살님, 여기 동참한 우리 대중 비록 수 적고 목소리 크지 않으나 부처님 법의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 평등과 평화, 자유를 갈망하는 온 세계 자유시민들과 한국 언론에 준엄하게 요구합니다.
1. 한·미 두 나라는 당장 「주둔군 지위 협정」을 사리에 맞게 개정하라.
우리 나라가 진정한 주권국이라면, 우리 땅에 들어와 있는 외국 군대는 우리의 국익을 위한 장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만 방자한 점령군이 아닙니다.
1. 전 세계의 자유시민들이여, 제국주의적 침탈 전쟁을 온몸으로 거부하라.
우리는 기름때와 화약냄새로 찌든 왕관을 쓰고, 뒤틀린 잣대로 남의 내정을 간섭하며, 제멋대로 악의 축이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미국의 제왕적 오만과 횡포의 뿌리가 이기적인 자원 착취와 제품 시장 확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언론은 왜곡과 어설픈 훈계를 중지하고 사실 보도에 충실하라.

“무명 속에 만년을 사느니 지혜롭게 하루를 사는 게 낫다!”고 가르치신 시방 삼세 제불 보살님께 다시 간절히 빕니다. 세상 모든 중생들 단 하루 단 한 찰나라도 밖으로만 향했던 손가락질 제 안쪽으로 되돌리게
하소서! 남의 눈물 위에 세운 기쁨은 진정 행복이 아닙니다. 오늘 자신의 안락과 행복이 다른 중생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살피게 하소서! 하루 단 한 번이라도 닫힌 가슴 열어 나 아닌 중생들의 슬픔과 외로움에 귀 기울이고 보듬어 안게 하소서! 끝으로 비옵나니, 구천에 떠도는 서러운 넋들 남김없이 불생불멸, 적멸의 땅으로 인도하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기 2546년 12월 12일
지리산 실상사 사부대중 / 금강경 결제 동참 대중

은하수
-고 심미선, 신효순 추모시

초여름 오전이었지요
저만치 어깨동무 미선이와 효순이가 걸어갑니다
친구 생일을 축하해주러 가는 길
두 소녀의 흥겨운 콧노래에
길섶의 풀들도 일어나 춤을 추고
잎새에 얼굴을 가린 풀벌레들도 키득거립니다
세상은 온통 신록의 잔칫집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풀밭이 조용해졌습니다
두 소녀가 콧노래를 멈추고 돌아보는 순간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미군 장갑차의 엔진소리만 귀청을 때렸습니다

피묻은 운동화 두 켤레-
효순이와 미선이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만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훈련중'이라는 세 글자에 재갈이 물렸으며
'무죄'라는 두 글자에 철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인공위성으로 온 세상을 감시하는,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못 볼 것이 없는
천 개 만개 미국의 눈이 멀었습니다
월드컵 때 휘날리던 태극기에는
'훈련중 무죄'의 글씨가 또렷하게 새겨지고
'대-한민국' 외치던 함성소리는
'효순아, 미선아' 대성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애초부터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왔습니다
점령군들의 범죄 57년사는
안락한 '소파' 위에 드러누워 내내 안녕하였습니다
지리산에 댐에 들어서려 하니
그제서야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 제대로 보이고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니
바다와 갯벌의 소중함이 드러나듯이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미국의 본질을 뼈아프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부끄럽게도 우리들은
미 점령군들의 만행을 애써 숨기거나 지우고
비굴하게도 잊고 싶어 안달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전부였습니다

어쩌면 초여름의 그날
효순이와 미선이는 친구를 만나
맥도널드에서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바로 그날 그 시간
저는 미제 오토바이를 타고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변을 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렸습니다
미국이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밤이 왔습니다
저 하늘의 은하수는
세상을 감시하는 인공위성의 그 무서운 눈빛에 사라지고
이 땅에, 광화문 네거리에
촛불 하나가 켜집니다
효순이의 감지 못한 눈동자 속에 하나
미선이의 감지 못하는 눈동자 속에 또 하나
촛불들이 계속 켜지고 있습니다
그 맑은 두 눈동자를 통해 또 다른 촛불들이 점화됩니다
그 촛불들이 모여 행진을 시작합니다

전국의 모든 길 위에 만개의 촛불이 켜지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두 눈동자 속에 만개씩의 촛불이 일렁이고
두 눈동자 속에 만개씩의 촛불이 일렁이는 사람들이 모여
이억개의 촛불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다시 십만개의 촛불이 켜지고
이백억개의 눈동자가 눈물을 흘리고
인드라망의 빛나는 구슬 구슬들-
그리하여 마침내 바로 이 땅에 촛불의 은하수가 흐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외로운 투쟁보다
전세계 민중의 암묵적인 동조보다
더 아름다운 투쟁
더 아름다운 각성
더 아름다운 승리의 물결
지상에 내려온 은하수가
전세계의 거리거리에 넘쳐납니다
화엄세계가 따로 없습니다

저만치 앞서서
어깨동무 미선이와 효순이가 걸어갑니다
친구 생일을 축하해주러 가는 길
두 소녀의 흥겨운 콧노래에
길섶의 풀들도 일어나 춤을 추고
잎새에 얼굴을 가린 풀벌레들도 키득거립니다
세상은 여전히 신록의 잔칫집입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가던 그 길을 따라
은하수가 흘러갑니다
촛불의 대은하가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미선이와 효선이의 극락왕생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 이원규

▲ 기도소에 안치된 영정
ⓒ 지리산생명연대

덧붙이는 글 | 행사를 준비하며 나눠줄 유인물을 만들고 작은 부착용 스티커들을 만들고... 자료를 수집하느라 범국민대책위 사이트를 드나들다보니 점점 더 슬픔과 분노가 밀려옵니다. 

늘 맘씨좋게 도와주시는 기획사에 가서 유인물 마스터를 찍어오는데 한사코 돈을 안받으시며 종이값만 주라고 하십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다 같이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 

자식 키우는 어머니 아버지들... 효순이 미순이 같은 동생들이 있는 우리들... 다같이 같은 마음으로 곳곳에서 저녁바다 촛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까운 약국에 가져다놓은 서명지에 한글을 몰라 부끄러워하시는 촌 할머니까지 대신 써달라고 서명을 함께 하십니다. 슬픔이 자꾸만 분노가 됩니다. 정말 자식 잃은 아버지처럼 탱크에 불이라도 질러 미대사관에 처박고 싶어집니다. 

살인자는 꼭 처벌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반복되는 '오만한 주둔군'의 범죄가 없어야 합니다. 한미주둔군협정이라도 당장 고쳐야 합니다.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자꾸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눈물은 놔둔 채 눈물로 같이 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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