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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항거의 역사

폭압의 시대. 시는 은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직설의 무기가 된다. '나는 왜 붉은 노을과 맑은 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이냐'며 시인으로 하여금 서정시를 쓸 수 없게 만든 광포한 시대를 아파했던 김남주 시인(94년 사망). 그는 일찌감치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5행의 짤막한 시로 설파한 바 있다.

▲ 생전의 김남주 시인.
ⓒ 아트앤스터디
미군이 없으면/삼팔선이 터지나요/삼팔선이 터지면/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
-- '다 쓴 시' 전문.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미국이 취한 오만한 태도와 파렴치한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연일 광화문을 촛불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 불평등한 소파개정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2002년 겨울. 최근 앞을 다투어 발표된 이산하와 박남준, 안찬수 시인의 시는 모두 '이 판국에 무슨 은유냐, 다시 직설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그 의미가 만만찮다.

'까짓 시 한 편이 무슨 힘이 있을까'라고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에다. 시와 시인의 역사를 돌아보자.

1789년 프랑스혁명의 불길 속에서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는 시에 곡을 붙인 <라 마르세에즈>가 파리 시민들에게 얼마만한 힘이었으며, 스페인 내전을 목도하고는 딜레땅뜨에서 민중시인으로 존재를 전이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편이 파업의 깃발을 세운 칠레의 광산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폭압자와 독재자들은 바로 이 시가 가진 무한하고도 무서운 힘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런 까닭에 흑백차별법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엄존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 해방'을 외치던 시인 벤자민 몰로이즈는 백인정권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단 만리타국인 남아공만이었을까. 한국의 저항시인들 역시 70년대와 80년대 내내 탄압 받았다.

김지하와 조태일, 김남주와 김준태를 필두로 하는 70~80년대 저항시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썼다는 이유로, 부자들의 이익분배법이 지나치게 불평등하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외세가 아닌 남과 북이 주도하는 통일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끌려갔고, 얻어맞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들의 시집 <오적>과 <자유가 시인더러> <나의 칼 나의 피>는 강제몰수돼 불태워지거나, 걸핏하면 판매금지조처에 묶여 독자들과 만나지 못했다. 항거와 저항을 노래한 시가 사람들 사이에서 노래로 불려지는 것은 폭압자와 독재자에게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바로 이 역사가 때론 총칼보다 강한 시의 힘을 증명한다.

▲ 지난 12월14일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가 열린 광화문.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2년 한국의 시인들, 오만한 제국을 질타하다

안찬수 "미국은 이리인가?"

<한 그루 나무의 시>의 작가 안찬수 시인의 여중생 추모시 '촛불'은 미국을 이리로, '반미는 위험하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극우세력을 늑대로 규정해 이들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분노를 드러낸다.

'이리들아/장갑차로 어린 소녀들의 살점을 물어뜯는 이리들아/소녀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스팔트를 붉게 물들일 때/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리들아.../늑대들아/우리들 어린 딸의 내장이 땅바닥에 쏟아지고 있을 때/확성기처럼 흰소리와 헛소리를 부풀리는 '찌라시'나 만드는 늑대들아/경찰력을 동원하여 항의시위자들이 앞길이나 막는 늑대들아...'

백주대낮에 이리와 늑대가 활보하는 시대를 만난 안찬수는 거리마다 벽시와 대자보가 나붙던 지난 시절을 다시 떠올린다. 하여, 그의 시에는 필남필녀의 안타까운 마음들이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인용되고, 인용된 그 글들은 안찬수의 시와 아름답게 만나고 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눈물. 이 따위 말로써 어떻게 너희들의 죽음을 위로하랴. 하지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용서해다오--최백호'
'그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투쟁하겠습니다--선주'


밀실이 아닌 광장에서 시민들과 만난 안찬수의 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외친다. '광화문 촛불시위가 '제2의 3.1운동'이자 '제2의 4.19'로 또는 '제2의 6월항쟁'으로 피어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바로 그 촛불들이 '장갑차와 탱크를 녹여서 쟁기를 만드는 평화의 촛불'이 되고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형제가 맞잡은 통일의 촛불'이 될 것이라고.

☞ 안찬수 시인의 시 전문보기

박남준 "너희들을 영원히 기억하마"

▲ 박남준 시인.
ⓒ 박남준 홈페이지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를 통해 맑고도 투명한 서정을 보여준 바 있는 박남준 시인도 사람 좋은 웃음을 싹 거두고, "미국에 빌붙어 눈치만 살피는 이 나라 대통령들이 너희들을 죽였다"고 애통해한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주 모악산 아랫자락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접시꽃을 보고는 썼다는 '흰 접시꽃 두 송이, 미선이와 효순이에게'라는 시는 무엇이 두 여중생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처참하게 죽였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죄가 있다면/자국민의 존엄성과 생존을 보호하지 못하고 짓밟으려는/못난 조국에서 태어난 것이리라/제국주의 미국의 식민지 분단된 땅을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둔 것이리라/사리사욕에 물든 이 나라 정치꾼들이/역대 군사독재 정권들이 너희들을 죽였다...'

박남준은 말한다. "어찌 몇 자의 글과 몇 줄의 시 한 편으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뼈아픈 자기반성은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죽였구나'라는 자학으로까지 시인을 내몬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박남준은 두 여중생의 삶과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시는 그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싸우겠다고 약속한다.

'기억하리라 이제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결코 너희들의 죽음 헛되지 않고 낱낱이 기억되리라/미선아 효순아/몸은 비록 죽었으나 죽지 않고 우리들 곁에 살아/아직은 가지 말고 두 눈 꼭 부릅뜨고 보거라/피어나리라 죽음을 넘어 피어나리라/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어 활활 타오르리라...'

☞ 박남준 시인의 시 전문보기

이산하 "믿을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 이산하 시인.
ⓒ 자료사진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발표한 신작시 '두 소녀의 죽음' 역시 거친 목소리로 미국과 무능한 한국정부를 꾸짖고 있다. 우리가 믿을 것이란 '우리 스스로'밖에 없음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

'아쉬움은 남지만 미군 당국의 사법권을 존중한다'는/이 피눈물나도록 가증스러운 친미 허수아비 정부를 믿지 말자/대통령이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이 영광스런 인권국가도/더 이상 믿지 말자/총독부 중의원으로 전락한 이 썩은 대한민국 국회도 믿지 말자/그리하여 오로지/추운 거리로 나와 양심과 정의의 촛불을 켠 우리 자신만을 믿자...

월드컵열풍에 휩싸여 두 소녀의 죽음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부끄러움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이산하의 시는 그날 우리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묻고 있다. 잔치의 불꽃놀이를 하던 순간 무자비하게 짓밟힌 순결한 꿈을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은 '시어(詩語)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달콤한 명제를 무너뜨린다.

'너희 미국놈들이 살인마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너희들의 양심에 사형을 선고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자/...북한의 남침...동북아의 평화...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너희 미군들은/영원히 이 땅을 떠나지 않으리란 것을 우리 결코 잊지 말자...'

☞ 이산하 시인의 시 전문보기

시인들이여, 다시 저항을 노래하라

앞서 언급한 김남주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시절이다.
"시인이여. 입을 열어 피압박 민중의 처참한 삶을 노래하지 않고, 식민지 조국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하는 시는 무엇이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안찬수와 박남준, 이산하의 시에는 약속이나 한 듯 거리에서 외쳐지는 구호 몇 구절이 섞여 있다. 이는 시어와 일상어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시인 또한 분노와 아픔에 눈물 흘리는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시에 다름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구호가 어린 두 넋이 떠도는 차가운 겨울하늘에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살인미군 즉각 처벌하라"-이산하의 시 중에서.
"소파협정 개정하라"-박남준의 시 중에서.
"미군은 물러가라"-안찬수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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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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