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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는 취객들만 찾다가 매년 12월 31일만 되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보신각. 1396년 처음 세워진 이후 몇 백년동안 4대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려주었다. 현재의 보신각은 1979년 8월 15일 세워진 것이다.
ⓒ 권기봉
2002년은 월드컵 4강 신화와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자존(自尊) 의식의 성장, 새로운 희망을 확인한 제16대 대통령 선거 등으로 다사다난했던 해여서 송년의 감회가 더욱 뜻깊다. 이런 2002년이었기에 여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정동진 새해를 보기 위해 청량리역을 찾을 테고, 낙조를 보기 위한 이들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막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2003년 첫 해를 보기 위해 하루 이틀은 족히 걸릴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방안에 앉아 새해를 맞자니 어딘지 모르게 밋밋한 것 또한 사실이다.

"턱시도와 산소통, 징, 김밥이 모두 통(通)하는 거리" 종로

▲ 1920년대의 보신각 사진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2층 구조와는 달리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형식으로 지어졌다. 보신각은 1396년 현 인사동 골목 입구에 처음 세워진 이래 네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에 걸친 중건을 거쳤다.
올 연말에는 결론 없는 고민만 하지 말고 친구나 연인, 가족들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서 보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위해 반드시 멀리까지 떠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도시든 크고 작은 송년 행사가 열릴 테고, 특히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송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종로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한다. 종로는 서울 한 복판에 위치한 동네이긴 하지만, '정동진의 희망'이나 '서해 낙조의 여운'에 버금가는 감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단 종로는 거의 일년 내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 넘치는 거리다. "턱시도와 산소통, 징, 김밥, 족보, 어린이와 청년, 노인이 모두 통(通)하는 거리 종로"(서현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에서)에는 한국의 거리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역동성이 있다. 이런 종로가 매년 12월 31일 저녁이면 그 활력이 절정에 달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여서 바로 오는 2003년 1월 1일 00시 00분 00초를 넘어서는 순간을 타종(打鐘)으로써 맞이하는 보신각(普信閣)이 있기 때문이다.

숫자 '33'과 '28'이 의미하는 것은?
민족대표 33인 때문이라고?

본문에서 보신각종을 파루(罷漏)에 33번, 인정(寅正)에 28번씩 타종해 4대문을 여닫는다고 했는데, 많고 많은 숫자를 두고 왜 하필이면 33과 28일까?

이는 불교의 '28계 33천' 우주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벽이 열리는 인시(寅時; 오전 4시경)에 33번 타종해 4대문을 열고, 유시(酉時; 오후 10시경)에는 28번 타종해 성문을 닫았다고 한다.

특히 파루에 타종하는 횟수 33은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 즉 하늘의 33천으로, 33천에 사는 사람들은 무병장수하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정에 타종하는 횟수 28은 동양에서 생각하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삼일독립만세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을 기리기 위해 33번 타종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틀린 해석이다.
/ 권기봉

지금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는 보신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신각은 도성 사람들의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즉 종각에 걸려 있던 종을 오전 4시경인 파루(罷漏)에 33번, 오후 10시경인 인정(寅正)에 28번 종을 쳐 성문을 여닫고, 도성 안팎 민중들에게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성 안에 큰 화재가 나거나 변란이 있을 경우에도 종을 쳐 도성 주민들에게 이를 알렸다.

바람 잘 날 없었던 비운(悲運)의 보신각

서울에 종각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이미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지 5년째 되는 13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세워졌던 종각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종로 2가 탑골공원 쪽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격인 옛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있었다.

거기 그대로 15년 정도 별 탈없이 서 있던 것을 태종 13년인 1413년 들어 광통교(廣通橋)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이후 세종 22년인 1440년 들어 동서로 5칸, 남북으로 4칸 누각으로 중건, 위층에는 종을 매달고 누각 아래로는 사람이나 말 등이 다닐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중건 당시 큰 종을 새로 만들어 걸었는데 약 130년 동안이나 걸려 있었다고 한다.

▲ 1895년 고종으로부터 '보신각(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받은 이후 보신각이라 불려왔다. 지금의 현판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쓴 것으로, 당시 권력자는 여기저기 자신의 글씨를 남겼다.
ⓒ 권기봉
그러나 제아무리 대단한 종각이라고 해도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파란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멀리 북쪽 국경까지 피난 갔던 정부가 다시 서울에 돌아와 보니 이미 종이 5분의 2 이상 녹아 있는 것이었다.

이에 광해군 11년에 네거리 중앙을 피해 종각을 다시 세우고, 세조 14년인 1468년 주조해 정릉사(貞陵寺)와 원각사(圓覺寺) 등을 떠돌던 종을 가져다 걸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마(魔)가 낀 탓인지 새 종각은 열흘도 버티지 못하고 시전(市廛)에 난 불이 옮겨 붙어 전소되고 말았다. 이후 인조 15년에 중건된 종각도 숙종 11년 들어 또 다시 불에 타버렸고, 곧 다시 들어선 종각은 그래도 고종 초까지는 무사했다.

그러나 이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종각은 기어이 그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고종 원년인 1864년 4월 또다시 시전에 난 불이 옮겨 붙었고, 다시 세워진 종각 역시 고종 6년인 1869년 9월 또 시전에서 난 불로 전소됐다. 동대문 개수 공사를 막 끝낸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중심으로 곧바로 재건되기는 했지만, 이미 수 차례에 걸쳐 화를 당한 종각이기에 애련함이 더하다.

이후 1895년 고종으로부터 '보신각(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받은 이후 보신각이라 불려온 종각은, 임진왜란 이전의 2층 구조와는 달리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형식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종각의 비운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현 위치의 보신각은 원래 태종 당시 옮겨졌던 곳에 그대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다. 즉 보신각은 도로 보수나 전란, 화재에 의한 소실 등으로 약간씩 뒤로 옮겨 새로 지어졌는데, 1979년 8월 15일 또 다시 뒤로 옮겨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우고 위층에 새로 만든 종을 걸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현재의 보신각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보신각, 새로운 안주인을 맞다

▲ 강건해 보이는 기둥과 장중하게 내리누르는 팔작지붕으로 인해 제법 무게감이 있어 보이는 2층 누각 형태의 보신각. 앙증맞으면서도 화려한 돌난간을 직접 보고 싶고 누각에 올라 종로를 내려다보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게 철망으로 둘러놓았다.
ⓒ 권기봉
한편 보신각의 안주인 보신각종도 건물과 마찬가지로 순탄치만은 않은 생을 보냈다. 원래 종각에 있었던 동종(銅鐘)은 1468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 태조의 제2비인 신덕왕후의 능, 즉 정릉을 지키는 능찰(陵刹)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폐사(廢寺)되자 원각사 등으로 옮겨졌다가 결국 종각으로 온 것이다. 보물 제2호로 지정된 이 종은 5백년 넘게 보신각과 함께 하다가 1979년 3월 균열이 발견돼, 결국 198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 3.18m에 아래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보신각종은 모양이나 장식 등에서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종의 몸체에 '성화 4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주조 연대가 확실한 동종이다.

원래의 종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새로 안주인이 된 새로운 종은 지난 1985년 8월 15일 광복 40주년을 맞아 옛 종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덕대왕신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태극과 무궁화 문양으로 장식해 새로운 느낌이다. 크기는 원래 있던 종과 비슷한 높이 3.82m에 아래 지름 2.22m, 무게 19.885톤으로, 성종사에서 만들었다.

보신각,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믿는 마음을 두루 갖게 하자’는 뜻의 보신각. 그 앞은 1898년 만민공동회로 붐볐고, 1919년에는 3.1 독립만세운동과 ‘한성정부’ 설립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편 19세기 후반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척화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보신각.
그러나 1396년 처음 세워진 이래 네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에 걸친 중건을 거치는 등 순탄치 않은 역사 때문인 지는 몰라도 지금의 보신각은 그저 쓸쓸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를 멀다하고 '신데렐라 황금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는 시각'이 되면 주변 유흥가에서 쏟아져나오는 취객들이 있으니 보신각은 그리 쓸쓸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들은 매정하게 그냥 가지 않고 선물이라도 되는 양 온갖 쓰레기를 남기고 가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아예 찾지 않느니만 못하다.

이제 보신각이 최고로 붐빌 시간이다. 일년 열두 달 조용하다가 매년 12월 31일 저녁만 되면 온갖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마치 연말만 되면 그 동안 뜸했던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과 같은 느낌인데, 오는 31일도 예외는 아닐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신각이 느낄 그 쓸쓸함을 모른다.

물론 이런 현상이 시대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이야 사람들마다 손목시계와 핸드폰 등을 통해 편하게 시각을 확인할 수 있으니 굳이 보신각 타종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사방이 뚫려 막힘이 있을 수 없고 통행금지 시간이 없으니 보신각종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 '정지된 시계' 보신각은 그저 철지난 옛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믿는 마음을 두루 갖게 하자'

▲ 1961년 3월 1일 김상돈 서울시장이 제42회 3.1절을 맞아 보신각종을 타종하고 있다. 특히 보신각종은 매년 주요 인물들이 모여 새해를 맞아 행하는 타종 행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생각해보자. 당시 서울의 중심이라 할 종로에, 그 종로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을 볼 때 단순히 시각을 알리는 종각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보신각이 서있는 이 자리는 우리 역사에 있어 소중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그래서 더 더욱 그 중요성이 돋보이는 자리인 것이다.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이른바 오상(五常)이라고 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신(信)'에서 보신각의 이름을 따왔다고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도성의 중요 대문은 오상에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동서남북 순으로 흥인문(興仁門)과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이라 했고, 북대문에는 '슬기 지(智)'자가 들어가야 할 것이나 '꾀 정(靖)'자를 넣어 숙정문(肅靖門)이라 했다. 그리고 도성 한가운데 위치한 종각의 이름에 두루 믿는 마음을 갖게 하자는 의미에서 '신(信)'자를 넣어 부르게 된 것이다.

나아가 보신각이 있는 자리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만민공동회를 연 장소로 우리 민족의 독립·개혁 의지와 직결된 의미 있는 장소다. 또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이자, 같은 해 4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이른바 '한성정부' 설립을 선포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19세기 후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전후해서는 흥선대원군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의 12자를 세긴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척화비는 이후 경복궁 근정전 서쪽 회랑으로 옮겨졌으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믿는 마음을 두루 갖게 하자'는 이름의 영향 때문일까. 지난 세월 국가적인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신각 앞으로 모여들었다.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은 다시금 개혁의 기치를 높일 것으로 보이고 국민들의 기대도 높아, 새해에는 더욱 활력 넘치는 변혁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는 지난 94년에 이어 또 다시 매우 곤란한 상황으로 치닫는 듯해 국민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비록 보신각은 종을 울리지 않는다지만 어려울 때마다 보신각 앞에 보였던 그 정신은 아직 살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신각 앞에 서서 밝은 2003년을 그려본다.

▲ 1985년까지 종각에 걸렸던 동종으로, 1468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 태조의 제2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능찰인 정릉사와 원각사 등에 있다가 종각에 걸렸다. 현재 보물 제2호로 지정된 이 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높이 3.18m, 아래 지름 2.28m, 무게 19.66톤.
ⓒ 서울시

▲ 지난 1985년 8월 15일 광복 40주년을 맞아 옛 종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 새 종은 성덕대왕신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태극과 무궁화 문양으로 장식해 이전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성종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높이 3.82m, 아래 지름 2.22m, 무게 19.885톤.
ⓒ 성종사

▲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지 5년째 되던 1396년에 처음 세워진 보신각은 원래 종로 2가 탑골공원 쪽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격인 옛 청운교 서쪽에 있었다. 거기 그대로 15년 정도 별 탈없이 서 있던 것을 태종 13년인 1413년 들어 광통교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진은 탑골공원에서 청운교가 있던 방향을 찍은 것이다.
ⓒ 권기봉

'지금의' 보신각과 '이전의' 보신각을 찾아가는 방법

먼저 지금의 보신각이 서울의 중심 종로에 위치하기에 찾아가는 길은 쉽다. 일단 지하철을 탄 다음 1호선이 지나는 종각역에서 내리자. 일단 여기서 내리기만 하면 출구 안내판에 '보신각'이 적혀 있으니 그리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면 바로 눈앞에 보신각이 보일 것이다. 서울에서 보신각만큼 찾기 쉬운 것도 없다.

다음으로 1396년 종각이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자리를 찾아가 보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이나 1호선과 3호선, 5호선이 모두 지나는 종로 3가역에서 내리자. 어느 역에서 내리든 서로의 방향 쪽으로 나와 걷다보면 탑골공원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도로가 지난다. 즉 이 도로를 중심으로 탑골공원의 맞은편에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 청운교가 있었고 그 서쪽에 종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표지석 하나 남아 있지 않아 머릿속에 그려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초행길이라면 자가용 승용차나 시내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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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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