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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대 대선은 누가 뭐라해도 세대간 지지후보 성향이 극명하게 구분된 선거였다. 심지어 세대간 대결이 지역대결이라는 낡은 틀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정치환경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해도 섣부른 평가는 아닐 정도이다.

2002년의 마지막 밤. 기자는 헤아리기 조차 힘든 사람들의  물결로 북새통을 이룬 광화문과 종로를 오가며 ‘1219 정치혁명’ 과정에서 맞닥뜨렸던 두세대를 만났다. 2·30대와 5·60대의 대결은 대통령 선거를 지나 아직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터뷰 1] 반미에서 반전으로 번져가는 반딧불이

31일 저녁 6시, 서울 광화문은 ‘반미’를 넘어 ‘반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앙마’라는 한 평범한 네티즌의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1000여 명의 촛불시위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어느덧 100만 반딧불이의 발걸음을 움직이는 큰불로 자라난 모습이었다.

▲ <12.31. 광화문에서 만난 반전피켓>
ⓒ 오용석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소시민이라 불렀다. 전쟁의 ‘전’자만 들리면 동네구멍가게를 뒤져서라도 ‘라면사재기’에 나서느라 분주했던 ‘순진무구한 국민들’말이다. 하지만 ‘1219정치혁명’을 일궈낸 시민들은 더 이상 수구냉전 논리에 놀아나는 허수아비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라면대신 ‘초’를 사재기해서 효순·미선이를 추모하고 한반도에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반전’과 ‘반미’를 외치는 2·30대 젊은이들이었다.

촛불에서 반미, 다시 반전으로

이성민(한성대 3학년, 민중과어깨거는정의의아웃사이더(준)회원) 

- 30일 노무현 당선자가 촛불집회 자제를 부탁했는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노무현(대통령 당선자)이 개혁성향을 지니긴 했지만 결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정한거 아닌가요? 소파(SOFA) 개정처럼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전시위로까지 나가야죠.”

- 촛불시위는 그동안 ‘반미’위주의 시위였는데?
“물론, 반미를 말하지 않고 소파개정이나 (한·미)불평등관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진 않아요.  하지만 미군과 냉전논리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전쟁반대로 냉전체제를 해체시켜야만 민족자주도 보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북한 핵문제로 전쟁위협이 커지고 있다는데?
“미국이 압박정책을 펼치기 때문이죠. 북한핵 문제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문제잖아요. 전쟁을 들먹거리는 미국이 나서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촛불시위같은 국민행동이 반전으로까지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반전메시지로 세계적 관심을 끌어내야하고 유럽 반전시위와 연대해서 미국의 간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반미를 넘어 반전으로, 아우러 회원들>
ⓒ 오용석
- 불매운동에 대한 생각은?
“최소한 상징적 의미는 있겠죠. 물론,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아니지만 요즘은 (정치적 견해가)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 영화 ‘007 언어더데이’가 오늘 개봉한다는데?
“북한 농촌에 물소가 지나가고 그런다면서요? 원래 ‘007 시리즈’가 냉전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잖아요. 우리나라 시민의식이 그렇게 낮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영화에서 나오는 냉전논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차라리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어요...보고나서 냉전세력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친미적 자주? 말이 돼!

최인찬(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단 회원)

- 촛불집회는 ‘이제 그만둘 때도 됐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데?
“집회는 계속되는데 매번 같은 방향이고, 특별히 눈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21일 집회에서 자유발언하시는 분들 중에 반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모습을 봤어요. 효순·미선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집회만이 아니라 미국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집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죠.”

-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반미·반전시위에 대해 우려하기도 하는데?
“요즘 보수언론에서 추모시위는 괜찮은데 반미는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반미나 반전을 외친다고해서 당장에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거나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데 찬성한다는 소리는 아니죠...단지, 한반도를 자꾸 전쟁위협이 있는 곳으로 몰아세우지 말라는 얘깁니다.”

- 노무현 당선자가 친미적 자주를 말했는데?
“애초부터 말도 안돼요. 친미적 자주라면 예전에 보수주의자들이 하던 얘기 그대로잖아요. 북핵문제로 미국이 전쟁위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효순·미선이 사건해결하고 SOFA개정같은 민족자주권 회복을 뒤로 미루자는 얘기잖아요. 북핵문제하고 평등관계문제는 같은 선상에서 동시에 해결할 문제인거죠.”

▲ <피켓을 제작중인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단 회원들>
ⓒ 오용석
- 외국언론에서는 북핵문제가 있음에도 반미를 외치는 우리국민이 ‘안보불감증’에 빠졌다고 하는데?
“국민들이 북한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같은 민족이고 동반자로 여겨야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국민들도 알고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북한 핵문제를 두고 미국이 압박을 가하고 미국언론이 전쟁을 선동하는데 반대해서 촛불시위에 참석하는 거죠.”

- 미국제품이나 문화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어떻게 생각하나?
“효과면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봐요. 꼭 어떤 방식이 (반미·반전을 주장하는 데)맞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시민들이 반미·반전을 위해 무엇하나라도 하기위해 행동한다는 게 중요하죠.”

- 영화 007 언어더데이가 매진사례를 이루고 있다는데?
“(다소 놀란 듯) 그래요?! 하지만, 영화를 본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영화가 끝나고 여기(촛불집회)로 오는 사람들도 많겠죠. 굳이 못보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 영화 보지말자는 의견이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 만큼, 강요해서 참여하도록 할 필요도 없으니까...”

반미·반전을 주장하지 않는 인터뷰

4·50대 선언,니들이'007'맛을 알아?!

저녁 9시, 광화문 일대에서 촛불집회가 한창일 무렵 종로 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 제5관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007 영화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매표소 직원에 따르면 이날 “007 언어더데이는 총 7회 상영분 중에 5회까지 매진”됐다고 한다.

▲ <'007 언어더데이', 이정도면 선전했나?>
ⓒ 오용석
상영관 좌석이 354석임을 감안하면 이 극장에서만 모두 2천여 명이 007을 보고 나갔다는 얘기가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날 007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 대부분이 4·50대 중년층이라는 것이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스피드한 액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아저씨들이 연말 극장을 접수했다고나 할까? 영화상영을 아직 1시간이나 남겨두었건만 다정히 팔짱을 낀 중년의 부부들이 벌써부터 군데군데 대기석을 채우고 있었다.

뽑았으면, 그 사람 말은 들어야지!

이정익(52, 부동산중개업)

-요즘 이 영화(007 언어더데이)를 두고 말이 많다는데...특별히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아니, 그냥 젊은이들이 하도 반대한다고 하기에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서 왔소. 허허허.”

-우리나라 자연환경이나 DMZ 상황설정 등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옛날에 ‘람보’나 뭐 그런 월남전 영화보면 마찬가지지. 그 사람들 보는 눈으로 그리니까 그런 것이지 뭐.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하잖아 스토리가 중요한거지...”

- 북한을 ‘악’으로 몰아 세우는 내용때문에 더 문제가 된 것이라는데?
“오락은 오락이지 뭐...그리고 원래 내가 007 영화팬이라서....”

- 요즘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미국물건 불매운동이나 헐리우드영화 안보기 운동이 있는데?
“재판을 잘못한 건 사실이지. SOFA도 개정하면 좋고...그런데 미군철수나 불매운동하고 그러면 그건 과잉반응이지. 지난번에 미국대사가 사과했잖아요? 꼭 대통령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원래 우방끼린데 그정도면 받아들이고 잘 지내는 방법을 찾아야지...”

- 불매운동이 우리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자꾸 이러면 미국도 감정이 있지 않겠어요...그러면 경제적으로 타격이 있지. 없다고 말할 수 있어. 우리나라가 미국하고 무역도하고 경제적으로 도움도 받잖아요.”

- 촛불집회가 계속되는 데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도 자제해달라고 했다면서...아, 자기네들이 뽑아논 대통령이 말하면 일단 들어주는게 맞잖아?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막무가네는 아니니까 때가되면 자제하고 그럴거에요.”

- 자제분이 집회에 나간다고 한다면?
“우리 딸이 나간다면 말려야죠. SOFA개정 같은 것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지 우리같은 사람들이 얘기해봐야...정치는 정치이지 서민들 사는 거하고는 다른 거잖아.”

배부른 반미세대, 배고픈 친미세대

이윤기(47, 시내버스기사)

- 이 영화를 놓고 관람거부 운동이 있는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20년동안 007 시리즈 팬이라서 보러 왔어요. 뭐 문제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거부운동하고 그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물론, 나도 우리나라(한반도)를 전쟁이 날 것같이 그려놓는 것은 못마땅하지...하지만 영화야 영화일 뿐이지.”

- 촛불시위와 관련해서 반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것으로 아는데?
“나도 젊은이들 주장이 무조건 틀리다는 것은 아니지...잘못된 건 바로 그것을 고쳐야지 엉뚱한 것을 가지고 트집잡으면 안되잖아요. 그리고 우리 생활속에 미국문화가 아닌 게 없잖아. 거의 다 아닌가? ‘반지의 제왕’은 미국영화 아닌가...너무 지나치면 허점이 드러나잖아.”

- 계속되는 반미시위를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치하고 문화는 별개잖아요. 미국이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아요.”

▲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이윤기씨 부부>
ⓒ 오용석
- 촛불집회나 반미시위가 계속된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하고 생각이 다르잖아요. 우리야 먹고살기 힘들고 했으니까 미국하면 우릴 도와주고 그랬던 나라라는 생각이 여기(머리)에 박혀있잖아...하지만 지금이야 풍요로운 시대니까 젊은 친구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지난번 선거때도 그렇고...인정하는 거야 서로서로...세대차이란게 있잖아...”

2시간 넘게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한 액션을 선보인 007 영화가 끝난 시간은 2003년 1월 1일 0시 20분이었다. 이미 저문 해는 가고 새해가 도착한 시간이었다. 촛불집회의 끄트머리를 취재하려고 서둘러 극장계단을 빠져나오다가 “이게 뭐 어때서 보라, 말라 그런거야?!”라며 볼멘소리를 하던 50대 아주머니 한 분을 보았다. 그분은 “난 북한을 한국보다 강한 나라처럼 묘사한 게 열받더라!”며 “북한이 우리보다 군사력이 쎄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나라는 제껴두고 북한하고 싸우는 영화를 만든 거잖아?”라고 옆친구에게 괜한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1219 정치혁명’의 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2·30대와 5·60대 사이의 세대차이는 없는 듯 하면서도 한번에 건너뛰기에 벅차보일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기도 했다. 물론, 양쪽 세대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5·60대와 2·30대는 효순·미선이 추모 촛불집회에서부터 007영화에 이르기까지 바라보는 시각에 공통점이 있었던 것만큼 감출 수 없는 차이도 드러냈다. 자라온 사회적 환경과 살아온 역사적 경험을 달리하는 양쪽 세대들은 또 언젠가, 또 어디선가, 또 무엇인가를 두고 맞부닥치게 될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생각과 견해는 달라도 서로를 인정할 줄 아는 ‘성숙한 다툼’이 지켜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 <부딪치되 싸우지는 말자>
ⓒ 오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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