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러시아계 귀화 한국인 박노자 교수(30, 러시아이름: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작년 7월 출간된 두 번째 저서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신문사)에 이와 같은 헌사를 담았다.
종교적 소신에 따라 처음으로 병역 의무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오태양에 대한 헌사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사회가 진실로 인본주의를 실천하는 사회"라는 자신의 소신을 드러낸 것이다.
작년 6월1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월드컵 응원 열기를 '집단적 히스테리'로 규정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던 박 교수가 겨울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대학로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www.transs.pe.kr)에서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박노자와 함께하는 근대계몽기 탐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적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도 한국의 근대성이 싹트기 시작한 구한말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박 교수는 지난 7일 강의에 앞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는 강의에 앞서 박 교수가 저녁식사를 하는 '틈새 시간'에 이뤄졌다. 식사중에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당하는 분위기에서도 박 교수는 싫은 기색없이 인터뷰에 순순히 응했다.
그는 인터넷의 영향이 컸던 지난 대선에 대해 "인터넷의 영향력 확대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20~30세대가 파시즘 세력을 심판한 결과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넷 문화가 깊이가 없고, 네티즌들이 특히 정치 이슈를 너무나 감성적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그는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민노당의 약진은 '미국의 길'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 교수는 "광화문 촛불시위는 비폭력시위였기 때문에 성공을 거뒀다"며 "비폭력 내지 폭력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최적의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이 운영하는 카페테리아는 식사비를 저렴하게 받는 대신 손님에게 식사 설거지를 시키는 '이상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식판을 들고 일어서며 "이것이 진짜 사회주의"라고 농담하는 그는 영락없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인물과 사상' 서울경기 독자모임에서는 11일 오후4시 서울 중구 명동 향린교회에서 박 교수의 강연을 개최한다고. 오는 16일 이한(離韓)하는 그는 곧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우리 안의 1백년, 우리 밖의 1백년'이란 제목의 연재물도 선보일 예정이다.
다음은 박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 투표권은 없지만, 만약 지난 대선에서 투표를 했다면 박 교수는 누굴 선택할 생각이었나?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지향을 가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찍어야겠지만... 권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다가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래도 나는 '원칙'을 고수했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후 다른 매체들과의 인터뷰도 많았는데, 그 중에 기억나는 것이 중앙일보(2002년 6월27일자) 인터뷰였다. "저조한 6.13 지방선거 투표율에서 나타났듯 붉은 악마를 배출한 20∼30대가 한국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반이 되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는 측면을 보여줬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는데, 20∼30대에 대한 당시 평가가 작년 12월 대선 이후에도 유효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번 선거에서는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봤다. '정치적 무관심층'으로 보였던 젊은이들 역시 군사독재 파시스트식 정치는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군사주의 문화나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2030세대는 파시즘을 대표하는 세력을 심판했다."
-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기대만 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미국은 석유자원이 있는 중동과 잠재적 적대세력이 될 중국을 통제하려는 패권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북핵 문제가 부각된 것도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인데, 만약 한국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한반도는 무척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크고 낙관적인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노동정책에 관한 한 노무현에게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 이번 선거에서 민노당이 95만표 정도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으로 약진했다. '정몽준 사태' 등이 감표 요인이 되었음에도 이 정도 성과를 얻은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2030세대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경향과 연관 있다고 본다. '미국의 길'이 아닌 다른 선택, 즉 유럽식 사민주의 국가의 길로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민노당이 그 기회를 적절히 포착했는데, 앞으로도 이러한 기대 심리를 잘 이용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민노당의 경우 아직까지 조직적으로 이념적으로 미흡한 면이 있다고 본다. 내부의 정파관계도 복잡한 듯하다."
- 12월 대선에 대해 인터넷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하는데 한국에서의 온라인 정치 문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고, 부작용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었나?
"인터넷의 영향력 확대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실제로 '90년대 후반 미국, 유럽에 불어닥친 반세계화 운동 활성화가 인터넷에 절반의 공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www.workingforchange.com, www. antiwar.com 등의 사이트도 가봐라.
그러나 현시기 인터넷 문화의 부작용은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이 특히 정치 이슈를 너무나 감성적으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니 계급적 소속감을 따지지 않고 호소위주의 정치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어 문제가 된다."
- 사실 지난 대선에서 네티즌들의 감성적인 측면에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노무현 당선자가 아니었나?
"노 당선자도 이를 이용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무현의 대중지향적 자유주의가 승리했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성숙했다, 부르조아민주주의가 공고화 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아직 한국사회는 사민주의로 전환할 준비가 안돼 있지만, 이를 바꿔나가야 한다. 한국에서 민주화가 확립되는 단계가 오면 결국 10년 내지 15년 뒤에는 복지국가가 될 확률이 높다."
- 한미 SOFA 개정을 요구한 광화문 촛불시위가 네티즌들을 통해 확산되고, 일부 보수층에서는 '반미' 구호가 나온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온라인 여론이 오프라인에서 표출되는 현상이 정착될지에 대해 논란이 구구한데...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물론 아직 한국의 반미운동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지만, 앞으로는 세계화된 반미가 자리를 확보할 것이다. 작년 12월31일 광화문 시위에 직접 참여해봤는데, '이라크 공격 반대'를 외치는 사람도 있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그것을 민족주의의 표출로만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싸우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문제지, 개별적인 미국인에 대해 적대감정을 갖는 것은 문제다. 청소년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맥도날드 같은 악덕기업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미국상품 불매운동은 찬성한다."
- 촛불시위 자체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촛불시위는 비폭력시위였기 때문에 많은 성공을 거뒀다. 이러한 비폭력 투쟁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촛불시위는 한국사회에 엄청난 의식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인들이 미국을 보는 시각이 이번 시위를 통해 많이 바뀌었다.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 약 74%가 노무현의 평화적 해결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 촛불시위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일부 몸싸움이 있었는데...
"몸싸움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의경들도 참으로 불쌍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하는 일이다.
폭력을 누가 행사하느냐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광화문에서 본 경찰들의 행동은 매우 놀라웠다. 경찰간부들이 참 파렴치하다. 부하들에게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거칠게 막고 그랬지만, 시민들이 먼저 폭력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경찰의 시민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러시아는 더 심각하다. 러시아에서는 TV 카메라 앞에서 경찰이 체불된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의 얼굴을 때려서 재판을 받은 일이 있다.
경찰은 무죄판결을 받고 노동자는 아직도 임금을 못 받았다고 들었다. 러시아는 지금 한국의 70∼80년대를 방불케 한다."
- 지난 8월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과)가 <계간 사회비평>을 통해 박 교수에 대해 "폭력의 전면적인 거부와 근절을 말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성의 기준을 총체적으로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고, 한달 후 반론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이 두 사람의 생각이 달라서인가? 아니면 오해가 있었던 것인가?
"둘 다 있었다고 본다. 생각이 다른 부분은, 현 체제에 대한 세계 민중들의 폭력적 대응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폭력 투쟁만이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승리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오사마 빈 라덴의 9.11테러를 미국패권주의에 대한 아랍의 저항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가?
"9.11 테러는 세계 민중투쟁에 큰 해악을 끼쳤다.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을 도리어 강화시켜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건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사람이 빈 라덴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반미 투쟁에는 동감하지만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식으로 빈 라덴을 매도할 생각은 없다. 민중의 이해관계에서 봐야하기 때문이다."
- 박 교수가 생각하는 '올바른 투쟁'은 무엇인가?
"비폭력 내지 폭력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최적의 투쟁이다. 예컨대 폭력을 쓰더라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처럼 폭력을 최소화시키고 선전이나 세계민중들과의 연대투쟁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김 교수는 폭력의 불가피성을 말하지만, 최근 세계 민중운동들의 흐름을 보면 폭력으로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 브라질의 경우 비폭력인 방법으로 룰라가 대통령이 됐고, 콜롬비아는 50년 동안 유격투쟁을 하고 있지만 나라가 완전히 찢겨졌다. 물론 콜롬비아 민중들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폭력투쟁의 한계는 분명하다."
-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했고,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에 이들을 따로 만날 계획이 있나?
"시간이 허락하면 만날 생각이다. 서울대생 나동혁 씨는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려 감옥살이를 치르게 하면서 병역은 치르지 않아도 되는 '맞춤 형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대체복무제의 허용이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남북화해가 대체복무제로 가는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다. 남한이 미국보다 북한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한다. 북한과 신뢰를 쌓아가야 감군도 가능하고, 그래야 대체복무도 가능해진다. 잘 하면 노무현의 임기 내에 대만처럼 대체복무제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월드컵 응원열기를 '집단광기'라고 비판한 <오마이뉴스> 인터뷰가 나간 후에 그러한 시각에 대한 비판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안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입장들도 충분히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