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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경제단체장들의 회동이 31일 대통령인수위 접견실에서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김재철 무역협회장,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노당선자, 김각중 전경련회장, 김창성 경총회장, 김영수 중소기업중앙회장.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경제단체장들의 회동이 31일 대통령인수위 접견실에서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김재철 무역협회장,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노당선자, 김각중 전경련회장, 김창성 경총회장, 김영수 중소기업중앙회장.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한겨레신문사를 갑자기 방문하였다. 북핵문제와 한미관계 등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그 배경에 언론계 안팎의 적지 않은 관심이 향했다.

노 당선자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방문 배경을 단순히 북핵문제 자문으로 이해하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언론사 과징금 취소문제를 둘러싼 인수위내의 혼선,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에 관한 <조선일보>의 특종 등을 의식하여 언론개혁에 대한 당선자의 의지가 변함없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해석이 등장하였다. 일부에서는 이제는 전체를 아우러야 할 당선자가 특정 언론사와의 연대의식을 부각시키는 것은 부적절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연히 한겨레신문사 방문 이후 새 정부 언론개혁정책의 강도와 속도를 둘러싸고 구구한 억측들이 꼬리를 물었다. 우선 노 당선자가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일은 정부가 나서서 강도높은 언론개혁을 이끌 것임을 예고한 것이라는 해석이 대두되었다.

개혁정책에 대한 구구한 억측들

언론개혁을 둘러싼 구구한 설들이 이어지자, 인수위원회가 발행하는 10일자 <인수위 브리핑>에서는 이에 관한 공식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여기에서는 "새 정부의 언론정책에 관한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며 "새 정부 언론정책이 법과 원칙에 기초해 공정한 룰대로 간다는 원칙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최근 노 당선자의 정책은 '언론개혁의 포기'도 '언론개혁의 시작'도 아니라는 얘기로, <조선일보>의 청와대 인사보도나 노 당선자의 한겨레신문사 방문을 언론정책 변화와 연결시켜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처럼 노심(盧心)을 둘러싼 구구한 억측과 해석들은 단지 언론개혁정책에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다. 재벌정책, 노동정책, 한미관계, 정치개혁 등을 둘러싼 새 정부의 정책기조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논의와 해석이 분분하다.

새 정부의 재벌개혁정책에 관해서도 언론개혁정책 이상으로 구구한 억측들이 계속되었다. 한 인수위원이 사견으로 언급한 '구조조정본부 해체 유도' 발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집단소송제 도입, 상속세·증여세의 전면 포괄주의 도입 등 공약사항의 이행 의사가 언급되자 강도높은 재벌개혁 의지로 해석되었다. 이에 전경련을 앞세운 재계의 반발이 뒤따르고 인수위와 재계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으로 비쳐지자, 인수위측이 이에 관한 진화에 나섰다.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은 재벌개혁정책들과 관련, "먼저 장기적인 비전이나 계획을 목표로 제시해서 기업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정부는 그 기간동안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그 문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서 입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노 당선자가 "장기적, 단계적,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여 인위적인 재벌개혁정책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발표를 통해 재계는 일단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재벌개혁정책의 강도와 속도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같은 입장발표는 인수위 내부에서 김진표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론이 학계출신 인사들의 강경론을 설득한 결과라는 해석도 뒤따랐다.

다소 혼란스럽게 비쳐지는 이같은 모습들은 결국 새 집권세력 내부와 인수위원회를 중심으로 새 정부 개혁의 강도와 속도, 그리고 개혁정책의 우선순위에 관한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하나 하나의 정책사안에 대해 노심(盧心)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상황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새 집권세력의 전체적인 개혁 청사진과 정책기조가 선명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그만큼 개혁정책을 둘러싼 내부적 고심이 깊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개혁정책 속도를 제약하는 제1요인 : 소수파 정권의 한계

지금 노무현 당선자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데에는 여러 장애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소수파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민주당의 의석은 103석. 반대로 야당인 한나라당은 151석으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반쪽짜리 정권인 셈이다.

인수위가 재벌개혁정책을 점진적으로 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재벌개혁정책들은 대부분이 국회 입법과정을 거쳐야 현실화될 수 있다. 한나라당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정책은 공론에 불과하다. 정치개혁 관련 정책들도 마찬가지이다. 노 당선자가 구상한 중대선거구제에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이상 현실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같이 소수파 정권이라는 현실은 노무현 정권 개혁정책의 속도를 제약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내년 4월의 17대 총선은 노 정권의 개혁정책의 향방을 좌우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17대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는 경우 노무현 정권은 사실상 1년짜리 정권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국회의석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한 더 이상의 새로운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역부족인 상황이 예견된다. 반대로 17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그동안 유예해왔던 개혁정책들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해질 수 있다.

17대 총선이 있기까지는 노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속도는 점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당의 동의를 구하면서 할 수 있는 개혁정책의 폭이란 대단히 좁은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도 노 정권은 국민적 동의 수준이 높아 야당이 외면하기 어려운 사안들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전략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고, 여기에는 정치개혁의 과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대선에서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한 현실도 노 정권에게는 부담으로 남는다. 48.9%의 국민은 지지를 했지만 나머지 절반 이상의 국민은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당선자로서는 자신을 반대했던 절반을 껴안기 위한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고, 그것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그 절반은 대체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던 층이다. 여기서 개혁과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생겨난다. 인수위 주변에서 나오는 이른바 '안정 속의 개혁'이라는 기조는 바로 이같은 근본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임 셈이다.

이같은 통합의 과제는 노무현 정권의 잠재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인 동시에, 개혁의 속도를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DJP 공동정부까지 운영하며 반대층을 껴안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김대중 정부가, 결국 개혁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일은 살아있는 교훈이 될 수 있다. 개혁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한국정치의 이 고전적인 딜레마 앞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제시할 새로운 해법은 무엇일까.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과 다르다

노무현 정권은 두말할 것 없이 변화를 내걸고 탄생된 정권이다. 그러나 최근 인수위를 둘러싼 여러 기류들을 돌아보면 새 정부 아래에서의 개혁정책이 대단히 험난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우선 새 정권을 대하는 각 세력과 집단들의 태도가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한나라당은 대선패배의 결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좌파정권론'을 비롯해서 대선 때보다도 더 거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다시 노 당선자측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97년 대선 이후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자숙'(自肅)기간이 크게 단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경련을 앞세운 재계가 노 당선자측의 정책에 대해 선전포고식의 공공연한 비난을 계속하는 것도 심상치가 않다.

전경련의 대변인격인 손병두 부회장은 노무현 당선자측의 재벌정책을 비난하고 나섰고, 김석중 상무는 "인수위 목표는 사회주의"라는 도발적인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정부 부처에서도 새 대통령 알기를 쉽게 아는 모습이다. 인수위 보고과정에서 노동부를 비롯한 여러 부처에서 당선자의 공약에 대한 "반대' 의견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노 당선자가 이같은 상황을 직접 나서서 질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들이다. 좋게 해석하면 권위주의 정치시대가 가면서 이제 대통령의 권위에 겁먹지 않는 수평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지만, 이면을 뜯어보면 역시 노무현 당선자의 개혁정책에 대한 견제가 취임 전부터 본격화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칫하면 노무현 정권은 시작부터 사면초가에 처할 위험도 있어 보이고, 정국상황에 따라서는 김대중 정권 때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반면 최근 인수위의 활동과정에서 보았듯이, 집권세력의 구심력은 그리 신뢰를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집권당인 민주당 또한 자기 발등에 떨어져있는 불을 끄느라 여력이 없어 보인다. 노 당선자 주변의 여러 세력이 개혁을 적절하게 이끄는 단일한 세력으로 자리하기에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노 당선자가 가장 크게 의존할 것은 결국 국민의 지지가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정권의 힘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의 개혁정책은 철저하게 국민을 의식하며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구할 수 있는 정책을 우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개혁정책의 우선순위를 합리적으로 잘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부에서는 '국민의 지지'라는 얘기만 나오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populism)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헌법에 국민주권이 명시되어 있는 국가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추진하는 게 어떻게 포풀리즘으로 매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과거 한나라당의 이회창 전 총재조차도 '국민 우선의 정치'를 내걸지 않았던가. 정책에 대한 절제와 긴장,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만 분명하게 지켜진다면, 국민의 지지를 추구하는 정치는 아르헨티나의 몰락을 낳았던 포퓰리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 될 수 있다.

소수파 정권이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것은 아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 일 이상으로 어려울지 모른다. 결국 믿을 것은 국민이라는 생각으로, 국민과 함께 의논하고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개혁정책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주간 <오마이뉴스> 제37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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