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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오후, 마침 수업이 비어 쉬고 있는데 구내 전화가 왔다.
“선생님, 여기 수위실인데요 옛날 제자 성봉주(가명)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네?! 기다리라고 하세요. 곧 나가겠습니다.”
‘성군, 그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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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역시 1972년 주만성(가명)군과 같은 해 담임 반 학생이었다. 키가 가장 작아서 출석부에 1번이었고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탓으로 몹시 절름거렸다. 거기다가 열병까지 몹시 앓아서 지능 지수가 낮은 지진 학생이었다. 모든 게 뒤떨어지는 녀석이었지만 학교만은 하루도 빠짐없이 언제나 가장 먼저 등교했다.
수업 시간 질문에는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로 시험 답안지에는 자기 이름만 간신히 쓸 뿐, 나머지는 제멋 대로였다. 그래서 학급에서 꼴찌는 그가 늘 도맡았다. 짓궂은 반 아이들 등쌀에 무수한 놀림을 받고 시달렸지만, 그는 덤빌 줄도 모르고 언제나 눈물만 훔칠 뿐 나에게 찾아와 자기가 받은 시달림을 한번도 하소연하지 않았다.
소풍 전날 종례 시간이었다.
“성봉주!”
“네, 선생님.”
원거리 소풍 때는 장애 학생이나 신체 허약자는 담임 재량으로 가정학습을 허용케 했다.
“너는 내일 오지 않아도 좋아요. 결석으로 치지 않을 테니.”
“아니에요, 선생님. 전 갈 수 있어요.”
나는 다소 불안했지만 그의 애절한 눈빛에 허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혼자 오지 말고 희규랑 손잡고 같이 와야 돼.”
“네, 선생님.”
금세 표정이 밝았다. 이튿날 내가 소풍 집결지로 갔을 때 그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미처 그를 확인하지 않자 열중에서 절름거리며 나에게 다가와서 도착 인사를 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그래, 고생 많았지?”
“아니에요, 선생님. 희규랑 같이 손잡고 버스 타고 왔어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활짝 웃으며 열중으로 사라졌다.
어느 날 성군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다. 서무실에다 등록금을 내고는 내게 인사하려고 왔다. 어머니는 쉰은 훨씬 넘었을 듯,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많은 한(恨)을 간직한 듯 했다.
“선상님, 철모르는 제 자슥 때문에 얼매나 고상이 많으십니까?”
어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시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흐느꼈다.
“글쎄, 자슥이 하도 시원찮아서 중핵교는 안 보내려고 했는데, 그 자슥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핵교 가겠다고 졸라대니 안 보낼 수 있어야지요. 제 자슥 제가 봐도 답답하고 속 상한데 선상님은 얼매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이가 착하고 정직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상님. 첫 돌 지난 후 우연찮게 앓더니 한쪽 다리도 절고 열병이 머리까지 옮았나 봐요.”
어머니는 내내 울다가 갔다. 아들 같은 내게 몇 번씩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담배 한 포를 책상서랍에 재빨리 넣고서는 일어섰다.
그 해 가을, 퇴근길 학교 정문 앞에서 성군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얼른 화장품 외판용 가방을 뒤로 감췄다.
“선상님 부끄럽습니다.”
“원,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선상님, 바쁘시지 않으시면 저기로 갑시다. 제가 맥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내 옷소매를 막무가내로 끌었다.
“아닙니다. 저는 술을 못합니다.”
나는 한사코 거절하고선 도망치듯 벗어났다.
“선상님, 정말 너무 서운합니다.”
뒤돌아보니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서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쳐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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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내가 수위실에 이르자 성군은 반가운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새 그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 저 취직했어요.”
그는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얘기부터 했다.
“아, 그랬어? 반갑다.”
“종로 5가에 있는 인쇄소에 다녀요.”
“참 잘 됐구나.”
“선생님, 저 이제 다리 많이 나았어요.”
그는 수위실 좁은 공간에서 두어 발자국 걸어 보였다.
“그래 학교 다닐 때보다 많이 나았구나.”
“오늘 일찍 끝나서 선생님 만나려고 곧장 왔어요.”
그 날 오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한 졸업생이 다녀갔다고 했다. 인상 착의를 들으니 성군이었다. 선생님을 조금 전에 만나 뵙고 돌아가는 길에 댁을 알아두려고 왔다면서 차 한 잔 마시고는 곧장 돌아갔다고 했다. 내 집은 주소만으로는 찾기 힘든 산비탈 높은 지대라 더운 날씨에 고생 꽤나 했으리라.
그 날 이후, 그는 가끔 내 집으로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문안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저희 집에 한 번 오세요. 엄마가 선생님을 꼭 한 번 모셔 오랬어요.”
“고맙다. 언제 한 번 갈게.”
어느 여름날 밤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창밖에는 장대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선생님, 저예요.”
“한밤중에 웬일이냐?”
“여기 순천향병원인데요. 엄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 선생님, 저 이제 어떻게 살지요. 엄마는 저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는 더 이상 말없이 흐느끼다가 한참 만에야 수화기를 끊었다. 잠이 싹 가셨다. 그의 흐느낌의 여운이 귓전에 맴돌았다. 성군의 어머니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이 험한 세상에 온전치 않는 자식을 두고 어찌 편히 눈을 감았으랴. 화장품 외판용 가방을 뒤로 감춘 채, 내 옷소매를 잡으며 눈물 글썽이던 어머니의 서러운 얼굴이 내 마음을 울린다.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는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다. 작품으로는 비전향 장기수의 딸과 해직기자의 순애보를 그린 장편 소설《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최근에 펴낸 산문집으로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샘물 같은 사람》《아버지의 목소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