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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할머니는 서당이나 야학, 학교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셨지만 체험에서 우러난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가운데 "막상 닥쳐봐야 그 사정을 안다"고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요즘이다.
열흘째 집안에서만 지내니까 좀이 쑤신다. 앞으로도 한 달 정도는 지나야 깁스를 풀고 얼마간 물리 치료를 받아야 정상으로 다닐 수 있다고 한다.
나야 일시적 장애지만 선천적인 장애인이나 후천으로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할지 그 사정을 요즘에야 어렴풋이 알겠다.
화장실 가는 일도, 몸을 닦는 일조차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나는 한쪽 다리만 깁스를 해도 그런데 두 다리가 장애인 경우는 얼마나 불편할까?
그런데 이런 장애는 누구에게나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장애인협회 통계자료를 보니까, 전국의 장애인 수는 450여만 명으로 전 인구의 10퍼센트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장애자의 통계이지, 여기다가 자그마한 장애와 정신적인 장애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것 같다.
33년 교단생활 가운데 20여 년 학급담임을 하였는데, 여러 장애 학생을 맡았다. 그 가운데 1984학년도 고2 때 담임한 박아무개군은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학생으로 날마다 어머니가 업고서 교실까지 데려왔고 종례 후면 데려갔다.
그는 조금도 성가시게 한 일없이 내 반에서 일년을 보내고 3학년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과 함께 그 어머니도 특별 개근상을 받아서 많은 학부모의 박수를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화장실에 갈 때는 친구들이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한두 번 아니 여러 차례 내가 시중을 들어줬을 것 같은데 그 시절 그냥 지나쳤다.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까 몹시 부끄럽다.
1972년 첫 담임을 할 때 출석부 1번이었던 성아무개군도 어릴 때 열병을 앓아서 한 다리를 조금 저는 장애 학생이었는데 그는 여태까지 나를 가장 많이 찾아 준 제자다. 올 설날에도 안흥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찾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언제 서울로 다시 오느냐고 보고 싶다고 울음 섞인 하소연을 했다.
그는 여태 가정도 꾸리지 못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다. 그는 삶의 고비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집으로 찾아와서는 한바탕 울고 간다.
이제까지 내가 그에게 해 준 것은 "참고 살아라"는 말과 요기나 시켜주고, 해진 신발이나 갈아주거나 약간의 차비나 쥐어 줬을 뿐이었다.내가 안흥으로 떠나면서도 그 녀석이 눈에 가장 밟혔다. 그는 안흥으로도 자주 문안 전화를 해왔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가 가장 슬프게 울어줄 것 같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에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회포나 풀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서울에서 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