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주당과 정국을 뒤흔들었던 '민주당 살생부' 작성의 주인공이 인천의 철공소 노동자이자 노사모 회원인 왕현웅(29)씨로 밝혀졌다.
지난 17일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 '살생부'는 '꾼에 의한 작품'도 '음습한 권력암투의 산물'도 아닌 한 평범한 네티즌이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것을 종합해 재미 삼아 작성한 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언론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살생부'는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을 증폭시켜 20일에는 민주당이 사법조사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에 떠돌던 수많은 글 중 하나인 '살생부'는 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면서 음모론적 부풀리기가 진행된 것이다.
<조선>에 의해 시작되고 <동아><중앙>에 의해 확산?
지난 5일간 왕씨가 작성한 '살생부'가 일부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되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언론의 현주소와 정치 풍토가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다.
지난 17일자 초판부터 <조선><동아>는 전례 없이 정치면에 '공신'과 '역적'으로 거론된 의원들의 실명은 물론 분류표까지 곁들인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실었다. 전날 <국민일보>가 별스럽지 않게 보도한 "'반盧의 거두~' 살생부 흉흉한 민주" 기사를 구체화하고 '살생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특히 <조선>은 이날 기사를 통해 "노 당선자 홈페이지 게시판 등에는 이와 비슷한 여러 살생부들이 돌고 있지만, 이 문건이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일부 자의적이고 거친 부분도 많지만, 친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의원 분류가 정확한 편이고, 민주당 대선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인사가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각종 일화 등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은 이어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 등의 반응을 과대 포장하면서 '살생부'를 정국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이어 <동아>도 "이 살생부는 단순한 등급 분류에 그치지 않고 의원들의 상세한 행적과 성향은 물론이고 당내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며 <조선>과 비슷한 설명을 곁들여 신-구 주류의 반응을 주요하게 다뤘다.
<대한매일>과 <세계일보>도 <조선>이 부여한 의미를 그대로 베낀 듯 '살생부' 작성자에 대해 "민주당 내부사정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석간인 <문화일보>는 17일자 사설 "'살생부'까지 나도는 정치풍토"라는 글을 통해 한술 더 떠 "'살생부'가 꾼에 의한 작품"이라고 규정한다.
"특1등 공신이니 역적이니 하는 섬뜩한 표현을 마구잡이로 동원하면서 선거 승리의 흥분, 비협조 세력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다분히 '꾼에 의한 작품'이지 단순히 감정을 누르지 못해서 작성한 글은 아닌 듯하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자로 잰듯이 논공행상의 기준을 제시한 점이다. 마치 재판장이 죄목과 이유를 들이대는 듯하다."
반면 17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경향><국민>은 <조선> 등이 부여한 '의미'를 따라가지 않고 논란이 되는 '살생부'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이를 기사화 했다. 하지만 <한겨레>는 아예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인터넷판 문화혁명' '인민재판' 등 사설과 만평을 쏟아져
그러나 18일이 되자 각 신문과 방송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인터넷판 문화혁명' '인민재판' '정치보복의 서막' 등 한층 선정적인 제목의 후속기사를 낸 것은 물론 사설과 만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선> 3면 민주당 "살생부 작성자 누구냐" 시끌, 의원들 "당 분열시킬 철부지 같은 행동" 당선자 측 "확인 않고 실명보도 무책임" 한나라 "인터넷 문화혁명 하려하나"
<동아> 5면 살생부 '역적' 의원들의 辯 "인터넷 정치 악용 비겁한 행위"/ 5면 [오늘의 이슈] 민주당 살생부 파문확산… "인터넷版 문화혁명이냐"
<중앙> 3면 "살생부는 철부지 같은 것"
<경향> 4면 '인터넷 살생부' 흉흉한 민주당 - '작성자 찾았다' 미확인 소문
<국민> 한나라 "인터넷정치 폐해 심각" / 민주 윤리위 '인터넷 살생부' 조사
<문화> 4면 '인터넷 살생부' 파문 확산
<세계> 4면 "누가 역적괴수란 말이냐"/ 5면 인터넷 살생부
<한겨레> 5면 "민주 '인터넷 살생부' 파문" / 5면 "출처불명 글 무책임 보도"
특히 <조선><동아><중앙><문화>는 18일 사설까지 내고 이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 | | 되돌아보는 <오마이뉴스> '살생부' 보도 | | | | <오마이뉴스>는 18일자 머릿기사로 "민주당 '인터넷 살생부' 누가 작성? 한나라당 "현대판 인민재판" 비난, 민주당 사정 잘 아는 인사가 '자유롭게' 작성한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에서 '살생부' 사태에 대한 민주당-한나라당 등 정치권의 반응과 함께 네티즌의 반응도 실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이 '살생부'는 민주당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인사가 쓴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부에서는 '살생부' 작성자가 민주당에 근무중인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하는 등 보수언론이 범했던 '우'를 되풀이 했다.
이어 "민주당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을 빌려 "작성자가 누구인지 당 지도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며 "검찰 수사를 의뢰한다든가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전했다.
당시 이 기사를 썼던 민주당 담당 이성규 기자는 "당시 민주당의 당직자들이 '우리당 사람이 쓴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해 그렇게 적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또 이 기사에서 "이 '살생부'는 정교한 보고서 형태의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판단과 느낌을 적은 정도다. 또 대상인물에 따라 평가의 길이도 들쭉날쭉이다"며 '살생부'에 큰 정치적 의도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 기사말미에서 네티즌들의 "왜 뒤늦게 난리부르스냐"는 반응과 서영석 서프라이즈 칼럼리스트의 '언론 호들갑 비판'을 비중있게 담아 나름대로 중간자적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공희정 기자 | | | | |
<조선>은 "공신·역적 심판하는 인터넷"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살생부' 등을 통한 인터넷의 정치 권력화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대통령 당선자가 인터넷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치의 주요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선 노 당선자의 홈페이지에 뜬 '민주당 살생부'는 단순한 '장난'일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알다시피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는 지금 온갖 허위 비방과 자극적인 과장, 명예훼손 등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원래 이런 것이고, 인터넷이 그냥 인터넷으로 있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난 대선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인터넷이 정도 이상의 정치적 힘을 갖게 됐다는 데 있다…."
<동아>도 "'살생부'로는 큰 정치 안된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노 당선자가 강조해온 통합의 정치, 화해의 정치와도 맞지 않다. '살생부'나 만드는 것 같은 낡은 행태와 습성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큰 정치는 불가능하다"고 훈계를 하고 있다.
"누가 왜 이런 음험하고 시대착오적인 인터넷문서를 만들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선거 기여도'에 따른 등급 분류와 함께 비협조 세력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쪽에서 만들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노 당선자측은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며 그런 내용을 보도한 언론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홈페이지 관리자로서 출처불명의 근거 없는 내용이라면 당연히 삭제해야지 이를 보도한 언론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우리는 특히 이 문서에서 정치보복의 냄새가 짙게 묻어 나고 있음을 경계한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당 개혁작업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정계개편 과정에서 이 리스트가 활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은 "'살생부' 나도는 정치권"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익명성과 동시 다발의 위력적인 전파력을 특성으로 한 인터넷을 이용한 방식으로 인민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며 "따라서 당선자 측은 이를 부인만 할 것이 아니라 작성자를 밝혀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민주당은 물론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본격적인 정치 보복의 서막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당선자 측이 인적 청산을 위해 애드벌룬을 띄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수도 있다."
<경향>도 "'살생부'가 새정치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 두사람이 만든 장난성 문건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뭔가 음습한 권력암투의 냄새가 난다"며 "인터넷정치를 빙자해 뒤통수를 치고 여론재판을 하는 비열한 정치풍토부터 바로잡기 바란다"고 인터넷 정치를 추구하는 노 당선자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조선><중앙><동아>에 의해 주도되는 '살생부' 부풀리기 보도태도는 20일에도 이어진다. 특히 <문화>는 1면을 털어 이를 기사화하고 관련기사를 3개나 면에 배치한다.
<조선> 5면 "'살생부' 불끄기 노 "오해 없길" … 당 차원 수습 나서
<동아> 5면 민주 "살생부 진상 조사"… 당 실무자 작성設 돌아
<중앙> 8면 민주 구주류 "친노측이 살생부 작성"
<문화>
1면 민주당 신-구주류 격돌, 한 대표 "정책 당과 협의-살생부 수사", <도올 김용옥기자 현장 속으로> 치국엔 권위확보 해야/
4면 민주 신-구주류 격돌 안팎 /
5면 민주 '살생부' 점입가경
<경향> 5면 민주 "살생부 윤리위서 조사", 출처 등 포착 시사…
<국민> 민주 당내갈등 노골적 표출
<세계> 민주 "살생부 작성자 찾아라"
<한겨레><대한매일>등 " 일부 언론의 음모론적 부풀리기"
그러나 모든 신문이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살생부' 키우기에 전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다. 몇몇 기자들을 통해 인터넷에 떠돌던 '살생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겨레>는 18일 "민주 '인터넷 살생부' 파문" "출처불명 글 무책임 보도" 등의 기사를 선보였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문건을 언론이 무책임하게 실명까지 적시해 보도한 것에 대한 문제점과 흥미 위주의 선정적인 보도태도를 취하는 일부 언론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대한매일은 18일자 사설 "`살생부 정치' 극복해야"를 통해 "검증이 안 된 인터넷 문건에 일희일비하는 정치권은 파문을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과잉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6∼7개의 ‘살생부’ 중 일부는 특정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는 것도 있다고 한다. 평가 근거가 당내 주요인사가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비중 있게 보고 과잉 대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문화> 김용옥 기자는 20일 이번 사건을 국민들이 어떠한 시각에서 분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살생부 문건이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최소한 친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의원분류가 매우 적확(的確)하며 관련된 일화도 민주당 대선과정에 깊게 개입한 인사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당 내부의 소행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수언론은 ‘살생부’사건을 빌미로 노무현의 정치기반인 대중참여수단을 무기력화 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살생부 그 자체는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케 되는 이면에는 노무현의 정치기반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치열한 힘 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경향>의 이재국 기자도 20일 기자메모를 통해 "('인터넷 살생부 파문'은)대선 과정에서는 물론 이후 인수위 활동에 대한 보도 과정에서 '인터넷 언론' '인터넷 정치'의 폐해를 집요하게 부각시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족벌신문들이 주도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시 읽어보는 이재국 기자의 글은 언론의 호들갑 끝에 살생부 작성자가 철공소 노동자로 알려진 지금 우리에게 '청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터넷 문화'에는 분명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한다. 참여민주주의의 활로를 여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익명의 그늘을 악용하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현재 일부 언론의 살생부 보도는 선정주의 보도라는 언론의 윤리 문제와 더불어 언론의 기본 역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한다. 사안을 전달하는 객체가 아니라 특정 의도를 갖고 파문을 확대재생산하는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는, 일종의 '언론권력적' 행태를 느끼게 된다고 하면 지나친 과민반응일까?
우리 정치사에서 권력 교체기마다 '살생부' 논란이 이는 후진적 행태와 더불어 일부 언론의 음모론적 부풀리기 보도 태도도 이제 '낡은 시대의 유물'로 청산돼야 할 것이다."
철공소 노동자의 작품으로 알려지자 이번엔 축소보도
살생부 파문을 키워가던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은 21일 살생부작성자가 평범한 철공소 노동자로 확인되자 이번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축소보도'를 했다. 이들 언론들은 사회면 혹은 정치면에 작은 박스기사로 '피투성이'의 커밍아웃을 전할뿐이었다.
독자들은 아마도 처음의 확대보도와 끝의 축소보도 사이에서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축소보도는 음모론적 부풀리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피투성이'가 된 왕현웅씨가 "조중동과는 인터뷰를 안하겠다"면서 그들을 무시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잘못 봤구나'하는 무언의 반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