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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

▲ 남강 이승훈 선생
ⓒ 오산학교
오산학교 교실마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사진과 함께 게시된 남강의 유훈(遺訓)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소월 김정식의 전기를 읽으면서 오산학교를 알게 되었다.

소월의 요람이었던 오산학교, 그의 스승 안서 김억, 횡보 염상섭이 교단을 지켰고, JMS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이었던 평북 정주의 다섯메 동산. 나는 오산학교를 꿈의 동산으로 동경했다.

천만 뜻밖에도 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971년 2월, 나는 오산학교 신임교사 채용 전형장에서 남강 선생의 사진과 유훈을 보고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그 무렵 시내 다른 학교에서도 채용 결정 단계에 있었지만, 남강의 말씀이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서울 보광동 오산학교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생들이 남강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재건한 학교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입지전의 인물로 당신의 몸과 넋을 오산학교와 이 민족의 제단에 바친 분이다.

선생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후 열 달만에 모친을, 열 살 때는 부친을 잃었다.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다.

소년시절 유기점 사환으로 장사를 배운 후 보부상으로 자립하여 마침내 큰 무역상으로 한때 전국의 경제권을 지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남강 선생은 중국 대련에서 귀국하였다.

고향 용동에서 은거생활 중, 마침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서 선생은 크게 깨쳐 구국교육의 깃발을 들고 오산학교를 인수 설립하여 민족운동을 위한 인재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신민회 사건을 비롯해서 숱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구국의 길을 걸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선생은 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고도 항상 입버릇처럼 “나는 무식해, 나는 무식해.”를 말씀하면서 당신이 교주이면서도 오산학교 변소나 푸시고 운동장 풀이나 뽑았다.

학교 재정이 궁핍하여 교실에 빗물이 스며들자 당신 집 기왓장을 벗겨다 갈아 끼우고, 교사들이 봉급 지불이 곤란하자 당신의 문전옥답을 팔거나 곳간 쌀을 퍼냈다고 한다.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은 한 번도 맡지 않고 다른 분에게 사양했지만, 학생들의 교육과 장래 문제에는 남다른 관심으로 지도하였다.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이면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여 함께 밤을 지내면서 그들의 장래를 열어주었는데, 선생은 학생들에게 교사, 목사, 의사, 변호사가 되기를 권했다.

교사가 되어 이 땅에 우매한 젊은이를 깨우쳐 장차 독립의 힘을 기르게 하고, 목사가 되어 어리석은 민중의 길잡이가 되게 하고, 의사가 되어 병마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들어주게 하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동포 편에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도록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쳤다.

선생은 많은 일화와 말씀을 담겼다. 오산학교에서는 지금도 10월 3일 개천절을 ‘남강탄신일’로 기념하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선생의 실제 탄신일은 3월 25일(음력 2월 18일)이다. 일제 때 개천절 기념식은 가져야겠고 그렇다고 버젓이 개천절 기념식을 하다가는 당장 학교 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 남강 선생이 묘안을 냈다.

“학교가 지저분하니 대청소를 합시다.”
그 날은 수업을 전폐하고 학생들과 학교 주변 청소, 마을의 도로 보수, 대민 봉사로 하루를 보낸 후 교직원을 댁으로 초대했다.

“오늘은 내 생일날이니 우리 집에 와서 식사나 합시다.”
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거듭되어 개천절이 선생의 탄신 일이 되었다고 한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 것도 선생의 힘이 컸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보면서 서명 순서에 왈가왈부 난항을 거듭할 때,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선생의 이 한 마디에 그만 순서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고 한다.

오산 출신들은 한결같이 오산정신을 부르짖는다. 오산정신은 곧 남강정신으로 곧 민족애라 하겠다.

그런 영향으로 오산학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인 김소월, 종교인 함석헌, 주기철, 사학자 김도태, 화가 이중섭, 독립투사 최용건, 김홍일 장군….

나는 오산학교를 별나게도 두 차례 재직하다가 떠나왔지만 그때의 제자들이 무척 정답다.

“선생님, 재학 중에는 오산정신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학교에서 오산정신을 너무 내세운 듯해서 거부반응을 일으켰는데, 막상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보니 그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부르짖는 게 없어 오히려 오산정신을 그제야 알게 됐어요. 오산정신이 비로소 훌륭하다고 느꼈고, 오산 출신임에 긍지를 느껴요.”

연초에 집으로 찾아온 한 제자의 말이다. 하기야 개성을 잃어버린 학원처럼 지식 전달에만 급급하여 상급학교 입시준비기관으로 전락한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무엇을 내세우고 무슨 정신을 부르짖을 수 있을까?

오산정신, 남강정신을 부르짖는 오산학교와 그 졸업생들의 독백이 시대 착오적인 ‘소경의 잠꼬대’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린 영혼들에게 겨레 사랑을 심어주는 교육은 민족혼이 메마른 이 땅의 교육 풍토에 눈물겹도록 갸륵하기만 하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 당신은 위대한 교육자입니다. 당신의 유해마저 학생들에게 이 민족에게 바쳤습니다.

당신의 혼을 두려워했던 일제의 제지로 유해는 비록 땅에 묻혔지만, 당신의 혼은 눈 뜬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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