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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나이를 먹던 1987년 1월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첫 아이를 얻었다. 전혀 속도 위반을 하지 않고, 정체나 지연 상태도 보이지 않고 정확히 실력 발휘를 한 셈이었다. 마흔이 다 되도록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여 혹시 '거시기' 쪽에 무슨 속사정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주변의 의심의 눈초리도 없지 않았던 바, 그런 것들을 일시에 해소시켜 버린 일대 '쾌거'이기도 했다.
첫 아이는 내가 바라던 대로 딸이었지만, 2.5Kg으로 아주 작게 태어난 아이였다. 늦게 결혼하여 어렵게 얻은 아이니 인큐베이터에 넣어보라는 의사의 권유도 있었지만, 자고로 아이는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는 법이라는 주변의 격려에 따라 다음날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아빠의 가슴에 한없는 신기함과 신비스러움마저 안겨 준 아이였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 늘 금이야 옥이야 하는 심정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 법이거늘, 하물며 불혹의 나이에 얻은 자식이니 항시 눈에 넣고 있어도 전혀 불편한 줄을 몰랐다. 본디 유난스럽게 어린아이들을 예뻐하여, 청소년 시절부터 이웃집 아이들의 볼에 침 묻혀 놓기를 좋아해서, "넘의 애두 저 지경으루 끔찍이 이뻐허니 후제 결혼헤서 지 새끼 낳으면 볼때기 남어나지 않을 겨"라는 말을 들어온 이력도 있고, 하여간 아이 기르는 재미는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깨소금 같던 세월이 겅중겅중 잘도 흘러서 아이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이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벌써 고등학생, 청소년기의 한복판으로 진입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오십대 중반, 중년의 언덕배기를 오르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에 속하는 사항이라지만, 딸아이는 내게 여러 가지로 고마운 아이였다. 2.5Kg의 작은 몸으로 태어나서 의사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던 녀석이 건강하게 쑥쑥 잘 자라서 현재는 166cm의 키를 갖게 되었고, 체중은 절대 비밀 사항까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비밀 체중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녀석의 체력을 지탱시켜주는 조건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녀석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중학교 진학에 대비하여 '반 배치고사'를 보았을 때 가장 많은 점수를 얻었다. 그래서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했고, 장학금도 받았다. 그리고 아빠의 경제 사정을 헤아렸음인지 중학교 3년 동안 학원이란 데를 한 번도 가지를 않았다.
녀석이 학교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은 성당이었다.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기 전까지는 모든 평일미사의 오르간 반주를 전담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서도 한 달씩 아침과 저녁을 바꾸어 전담하는 주일 미사 오르간 반주를 외지 고등학교 입학식 전 날까지 계속했다. 토요일 오후의 학생 미사와 갖가지 학생 행사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고도 녀석은 공부를 썩 잘해 주었다.
나는 딸아이 덕분에 인터넷을 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녀석이 하루는 내게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자진해서 내게 홈페이지라는 것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이 내 홈페이지 안에 설치해준 여러 개의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만 할 수 있을 뿐 '관리'라는 것은 여전히 까막눈이다. 내 홈페이지 관리는 지금도 딸아이 몫이다. 녀석은 최근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 사이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내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컴퓨터를 교체하면서 파일명이 모두 한글로 되어 있는 탓에 홈페이지의 목록들이 잘 열리지를 않자 2천 개가 넘는 파일들의 이름을 모두 영문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벌였다.
몇 날 며칠 동안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 작업을 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 대견스러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저렇게 아빠를 도와주는 딸아이, 홈페이지 작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아빠의 글들을 읽고, 아빠의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하며 스스로 유입되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딸아이가 참으로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딸아이가 아빠의 모교이기도 한 고장의 고등학교를 외면하고 외지 고교 진학을 희망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당혹스런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어린 아이를 너무 일찍 외지로 내보내는 것은 많은 불안과 걱정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경제적 부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말로 아이를 설득했으나 아이는 1학년 때부터 마음에 두어왔다며 천안 모 여고로 진학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아이의 소망을 강압적으로 꺾는 일도 차마 못할 일이어서 끝내는 내가 양보를 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이는 일찍부터 여러 고등학교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얻는 정보도 있었고, 인터넷을 통해서 얻는 정보도 많았다. 아이는 인성 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원했다. 스스로 공부하되 오로지 살벌한 경쟁으로만 달려가지 않고, 서로서로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인성이 바탕을 이룬 따뜻한 분위기를 찾고 원했던 것이다.
중학교 3년 동안 아이가 가장 크게 마음 아파했던 것은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쓰레기 하나라도 제때에 제대로 버리는 것은, 그것이 환경 문제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환경보다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과 더 많이 연결되는 문제라고 했다.
먹다 남은 우유를 아무 데나, 책상 속 같은 데다 버려두어 그것을 치우는 아이가 그만 옷을 버리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곤 하는데, 그런 일을 듣고도 미안한 마음조차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우유나 음식 찌꺼기를 아무 데나 찔러두는 것은 그야말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어린아이들의 교실 안에서 여러 가지 논쟁도 많았던 모양이다. 어른들의 유치한 지역감정이 그대로 유입된 상황의 정치 논쟁, 불상과 단군상과 성모상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식의 광적이고 공격적인 신앙 형태로 말미암은 종교 논쟁 따위에서 아이는 피곤을 느끼고 상처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되 살벌한 경쟁으로만 내달리지 않고, 남을 따뜻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결국 천안의 모 여고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그 학교가 천주교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 학교가 유난히도 '독서'를 강조하는 학교라는 사실에서 매료를 느낀 것 같았다.
(그 학교는 3일 입학식 후에 가진 학부모 총회라는 이름의 자리에서도 진학담당 교사가 독서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독서는 학생들의 사고력 집중력 창의력의 기본을 이루면서 학습 능력을 극대화시켜 준다는 논법이었다. 그래서 특히 1학년 시기에는 독서 권장에 큰 비중을 둔다는 얘기….)
그런데 아이는 무척 엉뚱하다 싶은 얘기도 내게 했다. 자신이 끝내 외지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장의 고교로 선회를 하면 그 학교에 희망을 걸었던 다른 한 아이가 그만 밀려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은 심정이었다.
아이의 입학원서를 천안의 그 학교에 제출하고 합격 통지를 받은 후 나는 여러 번 천안을 왕래했다. 다행히 그 학교로 진학하는 친구가 한 명 있어서 둘이 함께 생활할 원룸을 하나 얻어서 여러 가지 물품들을 구입하여 들이는 일을 했는데, 그야말로 제대로 한 살림을 차려주는 형국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세세하고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은지….
함께 생활하는 친구가 있어 두 집이 협의 협력하는 상황이 참으로 큰 다행이었다. 그만큼 두 아이가 서로 사이 좋게 3년 동안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어제(3일) 입학식에는 올해 연세 여든이신 어머니가 동행을 해주셨다. 손녀 사랑이 극진하신 할머니의 자상함과 세심함이 여간이 아니시니, 내 딸아이는 그만큼 복이 많은 아이였다. 어머니는 주인집에 특별히 부탁을 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손수 선물거리를 장만하시기도 했다.
입학식 후에는 두 아이가 생활할 방에서 밥을 지어 두 집 식구가 같이 먹고, 빠진 물품들을 구입하여 들여놓아 주고 저녁 6시경에 돌아오는데, 발길은 좀 무거웠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혼자 두고 온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텐데 둘이 같이 있게 돼서 여간 다행이 아니라는 말을 되뇌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내 기도를 하셨다.
나는 지금 천안으로 진학하여 나이가 늘어가는 아빠를 더욱 고생시키게 된 딸아이에게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딸아이와 함께 신입생 1차 소집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서 서산휴게소에서 태안천주교회 김용순 사목회장을 만났던 것이 고엽제 '의증' 검진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내 경제적 부담을 걱정하는 김용순씨의 질문과 채근 덕에 3년 만에 다시 고엽제 의증 검진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살 것이다.
그런데 딸아이의 고교 입학식을 한 어제 또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점심 식사 후에 딸아이와 함께 물품 구입을 하러 돌아다닐 때 홍성보훈지청의 왕인열 계장으로부터 '7급 국가유공자'로 확정되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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