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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후사 도시오(58) 사무국장(가운데)과 부인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 운영하는 식당. 이 부부는 수익금의 일부를 모임 후원금으로 기탁하고 있다.
하나후사 도시오(58) 사무국장(가운데)과 부인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 운영하는 식당. 이 부부는 수익금의 일부를 모임 후원금으로 기탁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정세연
미일전쟁 이후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안고 뼈저린 가난을 경험하며 어린 시절을 지나온 하나후사 도시오(58)는 이같이 말한다.

그는 일본 후쿠오카의 어느 한적한 동네에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자그마한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후쿠오카의 번화가 '불효자 거리'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던 도시오, 에미코 부부는 '광·부 재판을 지원하는 회'(시모노세키의 '광'자와 부산의 '부'자를 따서 광·부재판이라 함 = 편집자 주)을 시작하면서 지금 이곳으로 옮겨 왔다.

회의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 가게문을 닫고 또 다른 일터로 가야했기 때문. 현재 도시오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부부 외에도 모임의 회원 한 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광·부 재판을 지원하는 회'는 93년 4월 후쿠오카에서 결성돼 올해로 10년이 됐다. 이들은 주로 일본에 강제연행 돼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잘못된 역사 속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던 정신대 할머니들의 재판을 후원한다.

재판을 위해 일본에 온 원고들의 체류비용을 모금, 후원하고 재판내용을 회원들과 공유하며, 이러한 문제를 일본사회에 알리기 위한 홍보활동들을 해온 이들은 요즘 입법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민중에게 전쟁의 기억은 피해의 기억. 가해의 기억은 피해자로부터 고발되고 사죄, 보상 요구를 받아야 비로소 떠오를 수 있다는 도시오는 일본이 전후 처리를 하지 않아도 미국과 연계만 잘 하면 전후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역사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과의 일문일답.

ⓒ 오마이뉴스 정세연
-<'광·부 재판을 지원하는 회'>는 어떤 단체인가.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재판을 후원하는 작은 시민단체라 할 수 있다. 일본 전역에 600명의 회원이 있고, 10~15명의 회원이 중심이 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례회의를 갖는다.

93년 4월에 후쿠오카에서 결성돼 꼭 10년이 됐다. 1992년 12월 25일 부산에 살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와 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 4분의 재판이 시모노세키에서 있었다. 그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가 후쿠오카 사람이었고, 그 때 후쿠오카에서 이 모임이 결성됐다."

-위안부와 정신대의 차이는.
"한국에서는 두 용어에 대한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정신대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옳은 인식이 아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본 군대의 범죄이고 여자근로정신대는 일본기업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교사의 범죄이다.

미일전쟁 중 1944년 한국 여학생들이 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에 강제연행 됐다. '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도 있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 애국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소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들이 일본으로 건너 왔다. 물론 그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고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뿐더러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당시 2500명 정도 강제연행 돼 노동을 했는데 지금 이 사람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재판을 벌이고 있다."

-이 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소학교 5, 6학년 때였다. 나는 오카야마현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우리집 목욕탕 공사를 맡았던 마을의 건설업자와 친하게 지냈었다. 아이들을 예뻐한 그는 마을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판이 나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사람의 일을 돕기도 하고 휴식시간에는 함께 이야기도 나눴었는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이 전쟁 중에 중국에 가서 마을을 습격해 마을사람들을 고문하고 생매장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듣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죄 의식도 없이 떳떳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일본 전후 사업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한일회담이 시작될 무렵, 식민지배와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했다. 그런 경험이 배경이 돼 지금의 이 일을 하게 됐다."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 ⓒ 오마이뉴스 정세연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10년간 재판을 후원하면서 원고(할머니)들이 일본에 왔을 때 체류비용을 회원들이 함께 부담하고, 재판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이러한 문제를 일본사회에 알리기 위해 홍보활동도 많이 했다. 또 이 문제가 재판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아주 적기 때문에 요즘에는 입법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은.
"사실 전망이 안보인다. 현재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 야당3당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촉진법안을 입법으로 상정했지만 여당의 반대가 심해 심의가 잘 되지 않고 있다.

시모노세키 재판 1심에서는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국회에서 법률을 만들고 보상을 하라고 해 승리판결이 났다. 그러나 히로시마 재판은 패했다. 최고재판소에 이러한 재판들을 모아 상정하고 있는데 결과는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모르겠다.

현재 이와 관련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판은 모두 8개이다. 재판을 시작한 동기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 재판들이 모두 결집된 시점에서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해결방안은.
"10년간 싸워오면서 전후 보상 재판을 통해 작은 승리를 조금씩 축적해왔지만 여전히 힘들다. 문제해결의 가장 큰 장애는 전후의 역사 그 자체다. 가령 유태인 학살, 강제노동 등의 범죄를 저지른 독일은 진상규명과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었다.

만약 독일이 전쟁 직후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았다면 유럽에서 독립된 나라도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 의한 맹종구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전후 처리를 하지 않아도 미국과 연계만 잘 하면 전후 고도 성장이 가능했다.

이러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본이 아시아로 진출했고,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군사독재정권 혹은 독재국가였기에 진상규명이나 사죄, 보상 등이 없이도 경제협력의 형태로 관계가 해결됐던 것이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은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원폭, 공습 등의 피해자라는 의식만 강하다.

그러다 90년대, 전쟁 이후 반세기나 지나서야 겨우 침략전쟁의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전후처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전쟁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갈 때 피해자들이 나타나 고발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유럽에서는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전후 문제를 취급했지만 일본은 겨우 10년이 된 것이다.

진상규명이 중요하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한국 내 피해자들의 증언과 한국정부의 정보 공개가 중요하다. 일본에서도 4년 전부터 식민지배, 침략전쟁에 대한 정보공개와 입법운동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고 있으나 아직 일본정부는 천황의 전쟁 책임 등은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 한국에서 진상규명 법안을 만들고 운동으로써 연대해 큰 힘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부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부부 ⓒ 오마이뉴스 세연
-현재 이라크 전쟁과 북한 전쟁 위기 등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반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은 미국에 반할 수 없다. 전후처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민중들은 전쟁을 반대하지만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좀 더 가질 필요가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후처리를 해야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평화적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일본 내 우익세력은 북한의 공격을 우려하기 때문에 미국의 전쟁을 지지한다. 미국만이 일본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평화적 환경을 일본이 직접 만들어가야 한다."

-일본 내 운동세력의 현황, 그리고 평화운동의 관점은 어떤가.
"내가 학생이던 시기는 전쟁 이후 굶주리고 전쟁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던 시대였다. 1960년 일미안보조약 개정 때 몇 백만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했다. 이는 전쟁의 기억이 있었기에, 그래서 절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0년대 학생운동의 구호도 그랬다. 일본이 두 번 다시 가해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요즘에는 학생운동 세력이 분열되고 권력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많은 학생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지금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소유 형태의 운동'의 피해자이다. 소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관리교육이 진행된다. 그러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 고도 경제성장시기에 태어나 모든 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란 지금의 젊은이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 그것은 이상도, 변혁정신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미국의 원폭공습피해 또는 미국에 의한 동남아시아 전투 참전 등 피해자 의식으로 상징된다. 민중에게 전쟁의 기억은 피해의 기억이다. 가해의 기억은 피해자로부터 고발되고 사죄, 보상 요구를 받아야 비로소 떠오른다. 일본은 전후 오랫동안 책임, 보상을 추구당하지 않고 살아온 나라이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나마 현재 일본에게 좋은 조건은 주변의 나라들이 민주화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쟁의 피해가 밝혀지고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가 진척된다면 일본의 잘못된 역사가 밝혀지는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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