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소싸움대회에 한번 가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못갔던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올해는 꼭 가보겠다고 맹세 아닌 맹세를 하던 중, 2003년 청도국제소싸움대회가 열린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하늘의 장난인지, 개막일과 그 다음날까지 비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구경만 할 것 같으면 우산을 쓰고라도 봤겠지만, 어줍잖은 사진 실력으로 소싸움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찍어 보겠노라는 다짐이 속절없이 내리는 비 앞에선 허물어지더군요. 값나가는 카메라를 비에 젖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요.
다음 주말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주 일요일이 대회의 마지막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곳을 매년 찾는다는 어느 회사 동료의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일주일 이상 경기를 하기 때문에 막판에 가면 소들이 힘이 빠져 경기가 재미없어져."
그 동료의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청도국제소싸움 공식 웹사이트의 게시판에도 방문자들의 불평이 꽤 올라와 있었습니다. 대부분 소싸움이 날이 갈수록 맥이 빠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부턴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지요. 하루라도 빨리 가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드디어, 금요일 회사에 하루 월차를 내고 청도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폴폴 날리는 먼지 속에서 소싸움을 즐기고 왔습니다.
아침 일찍 도착해 뜨끈뜨끈한 장터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경기장 곳곳을 둘러봤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하더군요. 홍보관, 프레스룸, 전시실 등등 비록 천막시설이었지만 제법 국제경기장다운 면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지방 특산물을 파는 가게, 밥집, 술집, 고기집…. 울긋불긋한 깃발과 청도소싸움 캐릭터만 아니면 닷새마다 서는 시골장을 보는 듯했습니다.
경기장 뒤편은 싸움소들의 대기장입니다. 땅에 단단히 박힌 쇠말뚝에 매어진 소들은 그야말로 거대했습니다. 마치 소가 아니라 한마리 맹수같더군요. 더운 콧김을 뿜어내고 앞발로 땅을 긁어 흙을 공중으로 흩뿌리며 괴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집니다. 크고 순하게 생긴 눈을 껌뻑거리는 고향집 외양간의 소가 아니었습니다. 붉게 충혈된 눈은 전의에 불타는 용감한 전사의 그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첫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아직 빈 자리가 많았지만, 넓은 원형 경기장에 울리는 흥겨운 음악소리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됩니다. 북소리가 낮게 깔리며 장내에 울려 퍼집니다. 긴장 속에 주인의 손에 이끌려 경기장으로 들어온 소의 위세가 당당합니다.
마치 링 위에 올라온 복싱선수가 스텝을 밟으며 오른쪽 왼쪽 훅을 연습하듯 소는 경기장을 빙빙 돌고, 뿔을 모래땅에 비비고, 이쪽저쪽 움찔움찔 몸을 놀리고는 크고 길게 웁니다. 상대 싸움소도 경기장에 올라와 한껏 힘을 자랑합니다. 잠시 후, 심판과 주인에게 이끌려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온 두 마리의 싸움소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일단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힘을 시험해 봅니다. 밀었다가는 빠져 보고, 맞수의 머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옆으로 돌아보기도 합니다. 짧고 굵은 앞다리로 땅을 딛고 있으니 어느 쪽이든 쉽게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대편이 허점을 보일 때까지 지루한 힘겨루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허점을 발견한 듯 벼락같이 상대편을 몰아붙입니다. 날카로운 뿔에 상대편의 귀가 찢어져 붉은 피를 흘립니다. 여세를 몰아 계속 공격하니 귀가 찢어진 싸움소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머리를 돌려 달아납니다.
소싸움의 경기규칙은 간단합니다. 한쪽이 힘에 부쳐 달아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싸움의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소들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머리를 아래로 숙여 서로 맞대고 있지만 상대편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자신의 소와 함께 경기장에 올라가 있는 우주(牛主)들은 작은 마이크를 달고 있기 때문에 소를 지도하는 소리가 온 장내에 울려 퍼집니다. "아래로 파고 들어가, 옆으로 찔러, 머리 들어" 이렇게 주인이 지도하는대로 소는 끊임없이 상대편을 제압하려고 시도합니다.
소의 뿔은 씨름의 샅바입니다. 씨름선수들이 경기의 우선권을 쥐기 위해 지루한 샅바싸움을 계속하는 것처럼 소들도 서로의 뼈를 부딪치며 '뿔싸움'을 합니다. 뿔이 아래에 있는 소가 공격을 하는 소입니다. 그래야 들어치기와 같은 고급기술로 상대를 제압하기 쉽습니다. 당연히 소들은 자신의 뿔을 상대편의 뿔보다 아래에 놓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입니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소싸움에는 다양한 기술들이 있습니다. 밀치기, 머리치기, 목치기, 옆치기, 뿔치기, 뿔걸이, 들치기, 연타, 후려치기, 쳐올리기, 목감아 돌리기가 그것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기술인지 짐작이 가겠지만 태산같이 버티고 서 있는 상대편에게 이 기술들을 먹이려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겁니다.
이 기술들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강한 체력은 그야말로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체력과 함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이 싸움소들은 일년 365일 주인과 함께 훈련합니다. 커다란 나무를 적수라 생각하고 머리와 뿔기술을 갈고 닦는 것은 물론 타이어 끌기, 산타기, 달리기 등등 싸움소들의 훈련내용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훈련하는 것에 버금갑니다.
그리고 대회 한 달 전부터는 몸에 좋다는 십전대보탕, 미꾸라지에 개소주까지 달여 먹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마친 후 이 자리에 선 것이 저 싸움소들입니다.
이날의 두 번째 경기는 백전노장 '땡삐'와 신예강호 '대호'의 싸움입니다. '땡삐'를 소개하는 해설자의 목소리는 흥분 그 자체입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챔피언 벨트를 독차지하다시피한 '땡삐'는 생김새도 독특합니다. 대부분 하늘로 치켜 올라간 뿔을 가진 싸움소와는 달리 뿔이 뒤로 밀려 옆으로 삐죽 튀어나왔습니다. 검은 빛이 감도는 몸 색깔도 단단해 보입니다. 유난히 짧고 굵은 다리는 참나무 말뚝같이 땅에 박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호'도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는 해설자의 소개처럼 단단한 몸과 매서운 눈매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호가 땡삐의 곁으로 가려 하지 않습니다. 벌써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합니다. 땅에 앞발을 고정시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맞수를 노려보는 땡삐와는 달리 대호는 주변을 겉돌기만 합니다. 주인과 심판들이 용을 써서 대호를 땡삐 앞으로 데려다 놓지만 이내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시작되니 대호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땡삐에게 추호도 밀리지 않고 싸움에 임합니다. 간간이 허점을 노려 들어치기를 시도하고, 목감아 돌리기로 기선제압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일진일퇴를 계속하며 시간만 흐릅니다.
속이 탄 해설자가 연신 물을 들이키며 흥을 돋웁니다. 이 해설자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이 장내를 더욱 흥겹게 합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국제소싸움대회 해설자로서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심하기도 하고, 간간이 너무나 토속적인 어휘가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이 아저씨의 해설을 가만히 들어보면,
"저거 보소, 소XX이 축 늘어져 나왔는거 보소"라며 땡삐와 대호의 생김새를 설명하다가, "대호야 니가 좀 져도. 아입니더, 땡삐형님 형님이 좀 봐주이소" 라며 한치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는 땡삐와 대호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콩죽은 넘치지요, 아는 울지요, 소는 질라 카지요, 속이 타 죽겠심더, 속이..."라며 소주인들의 심리상태까지도 해설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간간이 멋진 기술이 선보이면 박수를 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다가 박수가 터져 나오면 "박수 치신 손님들 돈 마이 버소. 안친 손님들은 돈 마이 벌기나 말기나 나는 모르겠십니더"라고 분위기를 잡아 나갑니다. 이쯤되면, 국제규모의 소싸움대회 해설이 아니라, 노래자랑이 곁들여진 마을잔치 소싸움에서의 해설 수준입니다. 그래도 장내에 울려 퍼지는 해설자의 걸죽한 육성과 소들의 치열한 싸움, 이를 박수를 치며 듣고 보는 관중들이 어우러져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땡삐와 대호가 맞붙은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갑니다. 소싸움이 보통 길어봐야 이삼십분인 걸 생각하면 둘이 여간 맞수가 아닙니다. 처음에 이리빼고 저리빼던 대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잘 싸웁니다. 오히려 땡삐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땡삐의 머리는 대호의 뿔에 받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땡삐는 연신 입을 벌리고 긴 숨을 들이쉽니다. 대호의 입가도 허연 침으로 범벅이 돼 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다가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떼고 앞다리로 땅을 박차며 호흡을 고릅니다. "자, 다시 한번 해보자"며 다시 머리를 맞대고 더운 콧김을 뿜어 냅니다. 노련과 패기의 대결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도 한참을 더 싸우다가 대호가 고개를 돌리고 문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땡삐가 이를 놓칠리 만무, 곧 뒤를 쫓아가 대호를 공격합니다. 대호도 이에 질세라 다시 머리를 돌려 땡삐를 들이 받습니다. 땡삐의 승리로 끝났다 생각했던 관중들도 탄성을 지르며 일어섭니다. 대호는 정말 대단합니다. 또 다시 전과 같은 양상. 그로부터 둘의 싸움은 40분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마침내 대호가 꽁지를 빼고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땡삐는 "이제사 끝났구나"라고 하듯 대호를 쫓는 시늉을 하다가 관둡니다. 백전노장 땡삐의 승리입니다.
일본에도 소싸움이 있고, 스페인에도 소싸움이 있습니다. 올해 청도소싸움 대회 첫날 이벤트로 열린 일본 싸움소와 한국 싸움소의 경기는 한국소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났더군요. 그러고 보면 일본 소싸움도 별 것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 소싸움의 시작이 농경문화가 정착하던 때라고 하고, 조선시대에는 마을별, 집안별로 명예를 건 소싸움이 흥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소싸움이 일제시대때는 조선인들의 단합을 막기 위해 금지됐다고 하니 청도 소싸움대회에서 매번 한국소가 일본소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 것을 보면 통쾌하기 이를데 없지요.
스페인 투우는 사람과 소가 싸우는데 결국 소를 칼로 찔러 죽이지요. 사람과 소가 싸운다는 설정 자체가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고 결국 한쪽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소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요.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의 소싸움은 소와 소의 싸움입니다. 비록 뿔에 찢기고 머리에 받혀 피를 볼 때도 있지만 단단한 소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힘을 겨루다가 도저히 안될성 싶으면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화끈합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의 슬로건이던가요?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정정당당한 세상. 바로 소싸움에서 배울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일주일 간의 축제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우리 싸움소들의 신명나는 한판 싸움을 보려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청도에는 상설소싸움 경기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올 6월에 완공을 앞두고 있답니다. 조감도를 보니 월드컵 경기장 못지않을만큼 멋있더군요. 이 경기장이 완공되면 매일 소싸움을 구경할 수도 있고, 세계 각지의 싸움소들에 맞서 승리하는 한우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땡삐와 같은 우리 소가 미국의 버팔로를 한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도시에서 우권을 발행한다고 하네요. 이곳 관계자는 "승률이 50%에 달하는 도박이 어디있느냐, 건전한 레저문화로 정착될 것이다"라고 낙관하고는 있지만, 글쎄요 그건 좀더 두고봐야 할 것 같네요. 어쨌든, 넓은 모래판에서 듬직하고 당당한 소가 자웅을 겨루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재밌고 씩씩하더군요. 청도국제소싸움대회가 규모의 확장에만 치우치지 말고 온국민이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자리잡아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