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사립여고 정문에서 10여명의 이 학교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교사들의 유인물을 받아 들고 몇몇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겠다면서 더 달라고도 한다. 웅성웅성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선생님 힘내세요'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들이 받아든 한 장의 유인물은 정문 밖에서 학원 홍보물로 나눠주는 노란색 공책과는 영 딴판이다. 제목에서부터 '교권유린근절 교사폭력추방'이라는 거친 문구가 적힌 걸로 봐서 심상찮은 일이 이 학교에서 벌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제자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려고 교실 밖에 선 교사들. 이를 응원하는 제자들. 4월 1일 오후 4시 서울시내 Y여고 정문 앞.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과 일부 교사들이 교문에서 그렇게 조우해야할 사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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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교무실 '병부림' 사건
유인물을 나눠준 교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지난 3월 21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이 학교 교사 윤경수씨가 학급경비운영비 문제로 발언을 하려 하자 교무부장은 회의 종료를 선언하며 발언을 가로막았다. 발언권을 둘러싼 실랑이가 벌어졌고 윤 교사는 "무슨 권리로 나의 발언을 제지하느냐"며 이의를 제기, 교무부장은 "그래, 이제 어디 막 나가보자는 거야"며 호통을 침.
이때 전교조 분회장인 안모(여) 교사가 공평한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자 이 학교 체육과 지모 교사가 "어디서 소란을 피우고 난리냐"며 안 교사를 회의실로 끌고 가 다그쳤고 윤경수씨를 비롯한 여러 교사들이 회의실로 들어가 지 교사를 제지시켰다. 이후 이 학교의 전교조 분회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지 교사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기로 하고 교장, 교감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함.
교감은 22일 지 교사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이에 지 교사는 24일 월요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 교사는 갑자기 60명이 넘는 여교사들 앞에서 웃옷을 완전히 벗고 미리 준비한 소주병을 깨서 집어든 채 "앞으로 교무실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함부로 대들거나 소란을 피우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협박함.
많은 여교사들이 충격을 받고 교무실은 공포의 분위기로 변했고 이 와중에 교장은 단 한마디의 제지나 자제 요구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회는 즉각 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교장은 안 교사에게 "개인적인 문제이니 개인적으로 찾아와라", "분회장과 분회집행부의 자격으로 오면 대화할 수 없다"며 중재요청을 거부함.
이후 지난 28일 금요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지 교사는 공식 사과를 했으나 윤경수 교사를 비롯한 전교조 분회 소속 교사들은 이 자리에 불참하면서 '이번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신변의 위협이 자행되는 직원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앞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교사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힘.
현재 이 사건은 해당학교 전교조 분회 인터넷 카페에서 일명 '병부림 사건'이라 불리며 계속적으로 교사, 학생(졸업생 포함), 학부모 사이에서 문제되고 있다.
이러한 분회 소속 교사들의 사건 경과 설명에 대해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송모 교장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 교장은 28일 전 교직원들에게 나눠준 <학교장 입장 발표문>에서 "금번 지 선생의 돌출행위는 학생들을 지도하며, 모범을 보여야 할 교사로서 동료 전 교직원 앞에 너무 부끄러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지적한다"며 "이후 전 선생님은 우리 교무실을 사랑과 관용과 이해가 가득 넘치는 가정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아름다운 교직풍토를 만듭시다"
문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양측의 입장 차이다. 현재 송 교장은 지 교사에게 이 같은 행동에 대한 징계조치로 '근신'을 내린 상태다. 교장 및 부장급 이상의 교사들은 "사과도 했고 근신도 받았으니 이제는 두 사람간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교장이 이번 일을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지 교사의 그 같은 행동은 전교조 활동에 대해 지금까지 학교가 탄압해왔던 연장선이자 학원운영 경비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적으로 학교에 충성하라고 강요하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 교사에 대한 근신조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학생들한테나 내리는 근신 조치는 해당 교사에게 그냥 조용히 근무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교사에 대한 징계는 해임, 파면, 정직, 감봉, 견책 등 5가지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식으로 징계위원회도 열지 않은 채 교장 임의대로 규정에도 없는 근신을 결정해버린 것은 이사회에 보고도 하지 않고 이 사건을 유야무야 넘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분회 교사들이 '병부림 사건' 당시 이를 방조한 교장의 직무유기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와 해당 지 교사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장은 아직까지 아무런 대응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이날(4월 1일) 학교 정문에서 '병부림 사건 해결 및 교권탄압규탄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부 교사들의 만류로 일단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양보했다고 한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윤경수 교사는 "남·여 공학인 교실에서 한 남학생이 담임선생님 앞에서 웃옷을 벗고 '앞으로 선생님한테 대들면 각오하라'고 협박했다면 담임선생님은 그냥 '사과하고 용서하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교사라는 신분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번 사건은 정말 여성위원회에 제기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사제지간에서 동료교사로 함께 섰지만
지 교사는 사건 발생 일주일만인 지난달 31일 조퇴한 이후 4월 2일 현재까지 결근을 하고 있다. 이 학교 윤성열 학생부장은 1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원래 두 선생님(지 교사와 안 교사)은 사제지간이었다. 그런데 21일 교무회의 사건으로 안 선생이 지 선생한테 조직 안에서 공식사과를 하라고 말하니 지 선생이 자제하지 못하고 분개해서 그렇게('병부림 사건'의 발생) 된 것이다"며 지 선생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 선생이 지금 현재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근신'조치를 받고 있는데 이를 번복하고 다시 처벌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더 이상의 징계조치는 불합리하다"고 밝혔다.
지 교사의 학생이었던 안 교사는 이 학교를 87년 졸업한 뒤 이 학교에서 8년을 근무해왔다. 안 교사는 갓 부임했을 때만 해도 지 교사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안 교사는 "전교조 분회가 창립되고 우리가 학교 내 여러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 선생님과는 아예 외면하는 사이가 됐다"며 "이번 사건도 단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교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교조 활동에 가한 탄압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질적인 사립학교 문제
이 학교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한 여교사는 "사립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 학교도 투명한 게 한 가지도 없고 선생님들에 대한 폭언과 손찌검도 빈번히 일어난다"면서 "이 학교는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하느냐에 따라 '한 자리' 차지하게 되는 곳이다, 이런 학교에서 오죽하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겠나"고 힘겹게 토로했다.
학교 정문앞에서 유인물을 받아든 학생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교사들 곁을 떠나지 않고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우리는 선생님들 편이에요."
"이게 무슨 망신이야."
"2580에 우리가 전화할 거예요."
윤경수 교사는 2일 전화통화에서 "3일부터는 우리학교 전교조 분회 차원에서 '병부림 사건' 규탄집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