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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여고 분회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 류종수
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사립여고 정문에서 10여명의 이 학교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교사들의 유인물을 받아 들고 몇몇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겠다면서 더 달라고도 한다. 웅성웅성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선생님 힘내세요'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들이 받아든 한 장의 유인물은 정문 밖에서 학원 홍보물로 나눠주는 노란색 공책과는 영 딴판이다. 제목에서부터 '교권유린근절 교사폭력추방'이라는 거친 문구가 적힌 걸로 봐서 심상찮은 일이 이 학교에서 벌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제자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려고 교실 밖에 선 교사들. 이를 응원하는 제자들. 4월 1일 오후 4시 서울시내 Y여고 정문 앞.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과 일부 교사들이 교문에서 그렇게 조우해야할 사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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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교무실 '병부림' 사건

유인물을 나눠준 교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지난 3월 21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이 학교 교사 윤경수씨가 학급경비운영비 문제로 발언을 하려 하자 교무부장은 회의 종료를 선언하며 발언을 가로막았다. 발언권을 둘러싼 실랑이가 벌어졌고 윤 교사는 "무슨 권리로 나의 발언을 제지하느냐"며 이의를 제기, 교무부장은 "그래, 이제 어디 막 나가보자는 거야"며 호통을 침.

이때 전교조 분회장인 안모(여) 교사가 공평한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자 이 학교 체육과 지모 교사가 "어디서 소란을 피우고 난리냐"며 안 교사를 회의실로 끌고 가 다그쳤고 윤경수씨를 비롯한 여러 교사들이 회의실로 들어가 지 교사를 제지시켰다. 이후 이 학교의 전교조 분회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지 교사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기로 하고 교장, 교감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함.

교감은 22일 지 교사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이에 지 교사는 24일 월요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 교사는 갑자기 60명이 넘는 여교사들 앞에서 웃옷을 완전히 벗고 미리 준비한 소주병을 깨서 집어든 채 "앞으로 교무실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함부로 대들거나 소란을 피우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협박함.

많은 여교사들이 충격을 받고 교무실은 공포의 분위기로 변했고 이 와중에 교장은 단 한마디의 제지나 자제 요구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회는 즉각 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교장은 안 교사에게 "개인적인 문제이니 개인적으로 찾아와라", "분회장과 분회집행부의 자격으로 오면 대화할 수 없다"며 중재요청을 거부함.

이후 지난 28일 금요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지 교사는 공식 사과를 했으나 윤경수 교사를 비롯한 전교조 분회 소속 교사들은 이 자리에 불참하면서 '이번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신변의 위협이 자행되는 직원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앞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교사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힘.


현재 이 사건은 해당학교 전교조 분회 인터넷 카페에서 일명 '병부림 사건'이라 불리며 계속적으로 교사, 학생(졸업생 포함), 학부모 사이에서 문제되고 있다.

▲ 최근 교무실에서 '병부림사건'이 발생한 Y여고 정문
ⓒ 류종수
이러한 분회 소속 교사들의 사건 경과 설명에 대해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송모 교장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 교장은 28일 전 교직원들에게 나눠준 <학교장 입장 발표문>에서 "금번 지 선생의 돌출행위는 학생들을 지도하며, 모범을 보여야 할 교사로서 동료 전 교직원 앞에 너무 부끄러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지적한다"며 "이후 전 선생님은 우리 교무실을 사랑과 관용과 이해가 가득 넘치는 가정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아름다운 교직풍토를 만듭시다"

문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양측의 입장 차이다. 현재 송 교장은 지 교사에게 이 같은 행동에 대한 징계조치로 '근신'을 내린 상태다. 교장 및 부장급 이상의 교사들은 "사과도 했고 근신도 받았으니 이제는 두 사람간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교장이 이번 일을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지 교사의 그 같은 행동은 전교조 활동에 대해 지금까지 학교가 탄압해왔던 연장선이자 학원운영 경비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적으로 학교에 충성하라고 강요하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 교사에 대한 근신조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학생들한테나 내리는 근신 조치는 해당 교사에게 그냥 조용히 근무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교사에 대한 징계는 해임, 파면, 정직, 감봉, 견책 등 5가지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식으로 징계위원회도 열지 않은 채 교장 임의대로 규정에도 없는 근신을 결정해버린 것은 이사회에 보고도 하지 않고 이 사건을 유야무야 넘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분회 교사들이 '병부림 사건' 당시 이를 방조한 교장의 직무유기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와 해당 지 교사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장은 아직까지 아무런 대응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이날(4월 1일) 학교 정문에서 '병부림 사건 해결 및 교권탄압규탄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부 교사들의 만류로 일단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양보했다고 한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윤경수 교사는 "남·여 공학인 교실에서 한 남학생이 담임선생님 앞에서 웃옷을 벗고 '앞으로 선생님한테 대들면 각오하라'고 협박했다면 담임선생님은 그냥 '사과하고 용서하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교사라는 신분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번 사건은 정말 여성위원회에 제기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사제지간에서 동료교사로 함께 섰지만

지 교사는 사건 발생 일주일만인 지난달 31일 조퇴한 이후 4월 2일 현재까지 결근을 하고 있다. 이 학교 윤성열 학생부장은 1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원래 두 선생님(지 교사와 안 교사)은 사제지간이었다. 그런데 21일 교무회의 사건으로 안 선생이 지 선생한테 조직 안에서 공식사과를 하라고 말하니 지 선생이 자제하지 못하고 분개해서 그렇게('병부림 사건'의 발생) 된 것이다"며 지 선생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 선생이 지금 현재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근신'조치를 받고 있는데 이를 번복하고 다시 처벌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더 이상의 징계조치는 불합리하다"고 밝혔다.

지 교사의 학생이었던 안 교사는 이 학교를 87년 졸업한 뒤 이 학교에서 8년을 근무해왔다. 안 교사는 갓 부임했을 때만 해도 지 교사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안 교사는 "전교조 분회가 창립되고 우리가 학교 내 여러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 선생님과는 아예 외면하는 사이가 됐다"며 "이번 사건도 단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교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교조 활동에 가한 탄압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질적인 사립학교 문제

이 학교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한 여교사는 "사립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 학교도 투명한 게 한 가지도 없고 선생님들에 대한 폭언과 손찌검도 빈번히 일어난다"면서 "이 학교는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하느냐에 따라 '한 자리' 차지하게 되는 곳이다, 이런 학교에서 오죽하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겠나"고 힘겹게 토로했다.

학교 정문앞에서 유인물을 받아든 학생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교사들 곁을 떠나지 않고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우리는 선생님들 편이에요."
"이게 무슨 망신이야."
"2580에 우리가 전화할 거예요."

윤경수 교사는 2일 전화통화에서 "3일부터는 우리학교 전교조 분회 차원에서 '병부림 사건' 규탄집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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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꿈을 해몽한다" 작가 김훈은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말은 질펀하게 넘쳐났고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은 웃자란 말들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불어갔다"고 부끄럽게 회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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