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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동성애'를 청소년유해매체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차별행위'라며 청소년보호법(아래 청보법)의 심의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이로써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동성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온 인권침해 규정이 사라질 전망이다."

이상은 지난 4월 4일자 <오마이뉴스>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를 두고 또 어떤 논란이 오고갈지 모르겠지만 청소년 보호라는 미명하에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사회통제 메카니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예이기에 지난 번 홍석천씨의 동성애 강연 기사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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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살인, 어느 것이 더 해로운가?

<래리플랜트>라는 영화가 있다. 포르노 잡지인 <허슬러>의 발행인이었던 래리플랜트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것인데, 영화 속에서 래리플랜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섹스는 합법적이다. 그러나 섹스를 찍어 배포하면 감옥에 간다. 살인은 불법이다. 그런데 전장에서 살인을 찍으면 퓰리처상을 받는다. 과연, 섹스와 살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인간 세상에 해로운가?"

물론 이 말을 직설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여러가지 난점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과연 그가 그리고 <허슬러>가 얼마나 위의 말에 '진실'이라는 힘을 실어줄 정도로 사회체제의 억압이나 그 구성원의 권리보호를 위해 힘썼는가, 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지가 의문스러운 일생을 보낸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이라는 뻔한 속셈을 뒤로한 채, 인류 공동의 '적'(=후세인)을 만들어 놓고서는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하듯 일국의 영토를 폭탄으로 도배질하는 전쟁, 그 현실적 결과로서의 무차별 살인장면을 현장 생중계하는 CNN을 보고 있노라면, 래리플랜트의 상업성은 차라리 애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

'섹스와 살인, 과연 어느 것이 더 해로운가?'

이른바 '시큰둥하게 하기'

필자는 마광수 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으니 좋아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없는 건 당연한 것일 테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문학 작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문학의 소재가 '섹스'뿐인 것만이 아닐진대 유독 섹스에 집착하는 그의 작품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문체가 매우 독창적이거나 한 점도 별로 없는 것 같기에 나로서는 굳이 그의 작품들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을 통한 그의 '싸움의 방식'에는 거의 무한대의 지지를 보내는 편이다. 그의 소설들이 '근엄하신' 사법당국의 판단처럼 외설에 불과하든 아니든 그의 작업엔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른바 성의 '시큰둥하게 하기'.

'근엄'하기로는 사법당국 못지 않은 주류 언론의 메인뉴스 시간(2000년 5월 21일자 )에 그의 신작 인터뷰 기사를 문화의 한 경향으로 내 보내는 걸 보니, 적어도 과거처럼 일방적인 매도성 보도는 아닌 것 같기에 약간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아직 그의 '시큰둥하게 하기'가 완전히 결실을 본 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그의 작품이 뉴스거리나 시비거리가 되지 않는 그날까지는….

포르노는 국가전복자료다(?)

왜 마광수 교수의 섹스의 '시큰둥하게 하기'가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예가 있다.

2000년 4월 29일 개봉한 <섹스:애나벨 청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다. 이를 두고 251명의 남자와 연속적인 섹스 운운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광고 문구는 아예 무시하는 편이 좋다. 이 영화를 보고 '포르노의 성정치학'을 읽어내든 '아메리카 옹녀'밖에 보지 못하든, 그건 각자의 몫으로 치자.

문제는 애나벨이라는 이 리트머스 시험지(<씨네21>의 심영섭의 20자평)를 받아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자화상이다.

포르노 배우 출신이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는 '머나먼' 나라까지야 언감생심이겠지만, 이 '성스러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포르노 배우가 대학강단에 서는 것 조차 '체제전복의 위험'으로 인해 거부되는 모양이다.

2000년 4월 한국을 방문했던 애나벨 청은 단국대학교에서 '성과 사회'라는 교양과목 시간에 <섹스:애나벨 청 스토리 > 상영 뒤 학생들과 토론을 벌일 계획이었지만,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뒤, 학교측과 교수들로부터의 유언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보다 더 '웃기는' 이야기는 애나벨 청이 입국하면서 불거진 입국허가서 문제다. 이 '성스러운' 대한민국의 세관신고서에는 포르노가 '국가전복 자료'로 규제되어 있다고 한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행여 외국에 나가서 이상한(?) 책이나 기구들을 사가지고 오다가 '체제전복 세력'으로 몰리는 불상사가 없기를!

동성애는 안 된다?

지난 2000년 5월 13일 개봉한 홍콩영화 <심동>. 이 영화를 보고 금성무와 양영기의 20년에 걸친 그 절절한 사랑만을 느껴야하는 우리 관객들은 감독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본 셈이다.

홍콩 여성감독 장애가의 멜로영화 <심동>은 양영기와 금성무의 20년에 걸친 사랑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 집안의 반대로 양영기와 헤어진 금성무는 양영기의 단짝인 막문위와 결혼하지만, 옛 여인만을 바라보는 남편에게 지친 막문위는 이혼을 선언한다. 이것이 <심동>의 '국내 개봉판'이다.

하지만 <심동>의 원래 버전에는 막문위가 동성애자로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금성무만이 아니라 막문위도 양영기를 사랑했으며, 금성무와 이혼을 결심한 것도 끝내 양영기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편집을 통해 영화적 모티프의 가장 결정적인 설정과 계기를 지워버렸다. 이 정도이니 영화 내용을 뒤바꾸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했겠는가. 대표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제거하기 위해 대사를 엉뚱하게 번역했다고 한다(<씨네 21> 252호 참조).

영화를 보면 막문위가 금성무에게 이혼을 요구하면서 "너는 한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라고 말하지만 원래 대사는 "사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했어"였다고 한다. 그로써 막문위의 '커밍아웃'이 단순한 사랑의 투덜거림이 돼버렸다.

이에 대해 수입사의 한 관계자는 "금성무 팬이 많은 여중고생에게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절충이 필요" 하였기에 "홍콩 제작사와 상의를 거쳐 약 5분가량을 들어냈다"고 밝혔다 한다.

우리의 여중고생들은 '위험하고 불순한' 동성애를 보아서도, 생각해서도 안 되며 오직 순애보적인 사랑만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길들여진' 합리적 주체!

이렇듯 주류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다. 단순히 영화 한두 편 가지고 무슨 사회통제 운운하느냐며 시비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일들이 그야말로 어쩌다 있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느끼든 필자 같이 일상화된 메커니즘이라 느끼든 그건 각자의 몫으로 돌리자.

문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발생시키는 근저에 존재하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하게 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 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힌다. 그러니 대학 교수(마광수)라도 그 '합리적인' 주체들이 인정하는 선을 넘었으니 감옥에 넣어 인간으로 '갱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라는 아직도 장미여관에?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와 섹스를 '공론화한다'는 것은 가족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체제전복적' 위협에 속하는 일이다.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흥분해주는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주체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손쉬운 사회통제 방법인가? 우리 사회에서 섹스와 파업만큼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주체와 권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사태가 이러하니 사라는 아직도 저 어둡고 칙칙한 장미여관의 구석방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고, 마광수 교수는 사라를 그 구석진 방에서 대로를 활보하게 만들기 위해 이른바 레닌의 '막대 구부리기'처럼 섹스의 '시큰둥하게 되기'를 위한 한쪽으로의 편향을 감내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사라가 대로를 활보해도 곁눈 하나 주지 않게 되는 그날이 오면 마광수 교수는 어떤 작품을 쓸까? 아니, 그의 생전에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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