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길을 만들어 바다로 통하고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 물결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일상에 찌들어 귀 기울여 봐도 답답함이 쌓이는 계절. 4월엔 목련꽃 그늘아래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는가? 아니면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되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아주 잠시 떠나온 여행. 그 수녀원에 가면 뭔가 특별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연한 기대와 남국을 향한 그리움을 안고 얼마쯤 달렸을까? 창문 틈새로 풋풋한 갯바람 냄새가 피부를 촉촉히 적셨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이는 성산 일출봉의 표지판이 보이고 금방 손에 잡힐 듯 일출봉의 모습이 신화처럼 나타난다.
정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바다마다 구름이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는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한 바다가 그 슬픔을 만든다" 라는 시를 읊어보며 잠시 시인이 되어 본다.
섭지코지로 가는 길은 참 멀리 있었다. 거리로 생각해 보면 섭지코지 입구에서 주차 관리소를 지나 왼쪽 코지 북쪽 해안을 따라가면 약 1.5km 의 구간. 여느 때 같으면 한적한 바닷가로 통했지만 갑자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신양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겹겹이 자동차의 물결이 진을 이뤘다.
얼마를 기다려도 뚫리지 않는 길. 그러나 사람들은 불평 한마디 없다. 한적한 낭만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영상 속의 아름다움은 저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그 영상물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촬영지의 배경과 자신이 살아오면서 쌓아둔 인연들이 만남을 기억해 내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올인'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드라마 '올인'은 주인공들의 운명적인 사랑. 삶의 승부를 걸며 성공을 꿈꾸는 남자들의 야심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드라마의 배경이었다.
섭지코지는 제주의 방언 중 좁은 땅을 일컫는 코지란 방언과 코끝이란 뜻을 담은 코지가 모여 코끝처럼 튀어나온 좁은 땅이고 신양해수욕장에서 보면 나지막한 언덕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섭지코지에 들어서면 기막힌 해안절경과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이 어우러진 낭만이 일품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한라산이 보이고 성산 일출봉과 이어지는 바닷가에는 이끼로 덮은 바다가 금빛 물결로 출렁인다.
주차장을 지나 코지로 향하니 심술궂게도 바람이 불어온다. 이 바람은 벌써 벚꽃마저 다 떨어뜨리고 파도를 일궈 그리움으로 쌓여간다. 코지를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니 남녘 끝 마을에 성당이 보인다. 바닷가에 서 있는 하얀 집은 더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모두가 끈질긴 인연으로 만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보려는 것일까? 성당 주변에 다다르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바쁘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표시말이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왠지 이곳에 오면 이 수녀원에서 하룻밤을 지새며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잠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한 사람들은 벌써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기암괴석은 오늘도 망부석이 되어버린 선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기암괴석에 대한 슬픈 전설을 생각하니 섭지코지에 대한 환상은 는 더욱 애절하다.
옛날 이곳은 선녀들이 목욕을 하는 곳으로, 선녀를 한번 본 용왕신의 막내아들이 용왕에게 혼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용왕은 그 간청에 이곳에서 100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기다리며 100일간의 기도를 드리게 했다.
그 날부터 용왕의 아들은 99일 동안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올렸건만 마지막 100일이 되는 날 파도가 높고 바람이 거세어 선녀는 내려오지 못했고 결국 그 사랑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슬픔에 빠진 용왕의 막내아들은 섭지코지에서 외로이 떠있는 선돌이 되었다. 그 아픈 사랑 얘기를 기억하니 눈앞에 펼쳐진 기암괴석이 망부석처럼 느껴졌다.
수녀원에 다다르자 벌써 관광객들이 먼저 여장을 풀고 영상 속의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 분주하다. 하늘을 치솟을 듯한 십자가를 보며 어린시절 크리스마스 날 갔었던 교회당 생각이 났다.
기도원의 안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아니 아무도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통을 이겨냈을 성모마리아 상이 그 자리를 지킬 뿐. 그러나 아쉬운 것은 어느 누구도 그 수녀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녀원 주위를 맴돌며 사진 촬영하기에 바빴다. 오른쪽으로 능선을 타고 보이는 등대는 하늘과 맛 닿아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희미하게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과 일출봉의 모습이 동화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 보는 유채꽃은 그 의미가 다르다. 색깔이 그리움에 젖어 진할 뿐 아니라 햇빛에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은 마치 풍경처럼 아름답다.
유채꽃 밭은 거닐며 일출봉을 바라보니 끊질긴 인연으로 다시 만난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생각났다. 말보다 먼저 주먹이 앞서는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김인하와 맑고 순수하며 일에 열정적인 민수연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상재회랄까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진 이름만을 기억하고 추억을 되새김하는 나그네가 그리움으로 묻어 났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봉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다. 검붉은 바다와 쪽빛 바다. 그리고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진하디 진한 노오란 유채꽃. 그 유채꽃 밭을 거닐며 잠시 멀리 하늘을 바라본다.
섭지코지는 남제주군 성산읍 신양리에 있으며 제주시에서 12번 국도를 타고 40분쯤을 달리면 고성 일주도로에 도착한다. 성산읍과 신양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마치 잘룩한 여인의 허리를 찾아 나선다.
모래밭이 아름다운 신양해수욕장을 지나 바다 속으로,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그 바다는 길이 나 있다. 그리고 남녘 땅 섭지코지에는 예전에 미처 나누지 못했던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