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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 승선교. 벌교의 홍교보다 그 역사가 오래 되었고, 장엄하면서도 소박하고 단순한 듯 하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다리다.
ⓒ 김은주
영화 <동승>이 개봉 나흘만엔가 관객 13만 명을 넘게 동원했단다. 영화를 보는 내내, 줄거리보다 동승 '도념'이가 물을 길어오는 선암사 칠전선원 달마전에 있는 돌우물에만 자꾸 신경을 쓰고,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승선교에 한눈을 팔고, 단아한 선암사의 승방에만 한사코 마음이 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아, 이 영화 때문에 이제는 선암사도 끝장이겠고나'하고 말이다. 안 그래도 찾는 이가 많아서 그 맛을 잃을까 적이 걱정스러운 터에, 이렇게 영화까지 나오고 보면 선암사의 고즈넉함은 이제 추억 속에서나 꺼내볼 수 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소중하고 어여쁜 것은 저 혼자 갖고 싶은 이 놀부 심보라니. 쩝.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졸업여행을 간다고 하면 무조건 행선지가 제주도였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부산항에서 제주도까지 12시간이나 걸리는 뱃길을 마다않고 다녀온 경험이 있던 우리는 수학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을 그 졸업여행에 동참하고픈 마음이 생기지가 않았다. 대신, 내 친구 희정이와 나는 우리끼리 조촐한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고, 3박 4일 동안 순천의 송광사 앞 민박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다.

가방에는 책을 몇 권씩 집어넣고, 두툼한 공책도 한 권 준비했었다. 툇마루에서는 낮은 담장 너머 바야흐로 몸을 풀고 있는 붉은 땅이 보였고, 잘생긴 누렁소 한 마리가 밭둑에서 봄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송광사 건물 보수에 쓴다고 잔뜩 쌓아 놓은 소나무에 기대어 송진 냄새를 맡으며 봄볕에 취하기도 했고,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 한복판에 앉아 난분분 날리는 벚꽃 이파리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그 여행의 끝에 선암사가 있었다. 바로 영화 <동승>에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 없이 빌려 준 바로 그 절집이다.

▲ 선암사 일주문.
ⓒ 김은주
송광사에서 굴목이재를 넘어 선암사에 이르는 길은,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옛길 가운데서도 그 아름다움이 특별한 곳이다. 이맘 때 그 곳을 찾으면 4시간 남짓 걸리는 길을 걷는 동안 분홍빛으로 빛나는 참꽃이며 이제 막 새순을 내놓은 갈참나무 연두빛 이파리들, 층층나무 자그마한 이파리들을 싫도록 만날 수 있다.

선암사의 풍광 가운데 가장 앞에 놓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승선교이기가 쉽다. 나도 승선교 앞에서 필름 한 통을 거의 다 쓰고서야 계곡에서 벗어날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 갔을 때는 그저, '좋구나' 정도였는데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정감 있으면서도 장중한 돌다리에 마음을 흠뻑 빼앗길 정도로 고운 다리라는 걸 실감한다. 벌교에 있는 홍교도 좋았지만, 선암사에 있는 이 승선교의 아름다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 선암사에서는 승선교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 출입을 자제시키고 있지만, 그 다리를 직접 건너보려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
ⓒ 김은주
두 번째로 꼽을 것은 동승 도념이가 수시로 드나들며 물을 길어오는 돌우물, '달마전 석정'이겠다. 네 개의 돌확에 고인 물이 저마다 쓰임이 달라서 첫 번째 상탕은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와 차 끓이는 물로, 두 번째 중탕은 밥이나 국 끓이는 물, 그 아래 하탕은 과일이나 채소나 쌀 씻는 물, 마지막 막탕은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하는 물로 쓴다. 도념이가 물 한 그릇을 청하는 서울 부인에게 물 떠주는 장면을 유심히 한번 보시라. 네 개의 돌우물 가운데 몇 번째 돌우물에서 물을 떠서 주는지 살펴보면 도념이의 간절한 마음이 두 번 새겨지리라.

세 번째로는 생태적인 뒷간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빼놓지 않는 선암사의 뒷간을 들고 싶다. 바람이 잘 통하는 구조라서 볼일 보는 동안에도 바깥 바람을 수시로 쐴 수 있고, 나무 창 밖으로 푸른 이파리들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 또한 무엇보다 좋은 곳이다.

▲ 뒷간에서 볼일 보면서 내다본 풍경. 확실하게 '시원'한 뒷간이다.
ⓒ 김은주
그리고, 우리 전통차의 맥을 굳건히 이어 가고 계신 지허 스님이 자랑해 마지 않는 선암사의 자생차밭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보성의 대한다원이나 일본에서 들여온 야부기다종 차나무에서는 맛볼 수 없는 우리 자생차의 멋을 맛볼 수 있는 곳 또한 선암사만한 곳이 없다.

▲ 선암사 자생차밭 들어가는 길. 걸쇠도 없이 그저 네모낳게 나무를 둘러 놓았을 뿐이다.
ⓒ 김은주
쓰다 보니, 다시 선암사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친다. 마음 속의 불길을 어찌할 길이 없어 손가락을 태우고야 마는 정심 스님은 도념이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세상에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도 끝끝내 기다리는 마음, 그것이 도념이가 엄마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겠다. 선암사로, 굴목이재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접고 또 접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할아버지 스님은 알고 계실 것이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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