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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생 묘
만해 한용운 선생 묘 ⓒ 이종원

망우리 고개

망우리 시민공원에 갈려면 망우리고개에 올라서야 합니다. 이곳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기분이 묘합니다. 빽빽한 무덤 밑에는 아파트가 뺑 둘러쳐 있어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지요.

태조 이성계가 그의 능지를 둘러보고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이 고개를 이르러 "이제야 근심을 잊었구나"라고 해서 '忘憂里'라는 이름을 얻었답니다. 얼마나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망우리 근처에 산다고 하면 듣는 얼굴 표정이 좋지 않네요. '망우리'라는 어감이 좋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공동묘지가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세상 근심을 잊을려고 애쓰고 있어요. 고개를 넘어가면 근심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옛날에 이 길을 따라 왕의 행차가 있었을 겁니다. 동구능을 향해 문무백관들이 길게 늘어선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죽은자의 휴식처-망우리 시민공원
죽은자의 휴식처-망우리 시민공원 ⓒ 이종원

망우리 시민공원

죽으면 다 똑같을 것을... 왜 그리 세상을 매정하고 아둥바둥하게 살았는지 반성을 해봅니다. 아마 묘지만큼 좋은 교육효과도 없을 겁니다.

이름 없는 민초부터 유명인사까지... 그리고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 반면에 한을 품고 죽어간 사람도 함께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는 누구나 평등하네요. 결국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보편적 진리를 너무나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곳에 왜 공동묘지가 생겼을까요? 그 이유는 일본의 계략이 숨어있습니다. 조선 왕릉의 집결지인 동구능이 지근거리에 있고 또 같은 능선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왕이 뭐 특별하냐? 일반 백성과 똑같지"라는 것을 주입하면서 민족 정신을 말살할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요. 경복궁 마당에 불교 유물을 가득 모아두고 물산박람회를 개최한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총 면적이 60만평에 무려 33만기의 묘가 펼쳐져 있답니다. 높은 곳에 올라서 밑을 내려보세요. 둥그렇게 튀어나온 봉분들의 집합체가 묘한 감흥을 일으킵니다.

시인 박인환선생님 연보비
시인 박인환선생님 연보비 ⓒ 이종원

비운의 청년 박인환 시인

관리 사무소에서 직진하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유명인사들 대개가 좌측 길로 들어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박인환 시인만은 우측에 있답니다. 죽어서도 고독을 지키는 시인의 모습일까요?

박 시인은 참으로 비극적 시대를 산 사람이지요. 청소년기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냈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혼란을 겪고 그리고 6.25 때는 종군기자의 역할을 하고, 기어코 31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박 시인 묘비에는 '세월이 가면'이란 시의 1연이 새겨져 있어 더욱 슬픔을 느끼게 하네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공원내 순환도로의 길이가 5.2km나 된답니다.  선혈들의 넋을 기리며 걸어봅니다. 요새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걷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합니다.  살랑이는 바람에 꽃가루가 눈처럼 떨어집니다.
공원내 순환도로의 길이가 5.2km나 된답니다. 선혈들의 넋을 기리며 걸어봅니다. 요새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걷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합니다. 살랑이는 바람에 꽃가루가 눈처럼 떨어집니다. ⓒ 이종원

지석영선생님 묘소
지석영선생님 묘소 ⓒ 이종원

송촌 지석영묘

누구나 팔뚝에 우두자국은 있을 겁니다. 어머님의 자국은 큼직한 도장이고, 저는 작은 도장, 제 아들은 희미한 자국이더군요. 요새는 발바닥에다 주사를 놓는다고 합니다. 만약 이 주사를 맞지 않았다면 천연두로 죽어갔으며, 살았다 하더라도 평생 곰보로 살아야 합니다. 성형수술 잘못 했다고 자살까지 하는 세상인데... 곰보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천형을 면해주신 분이 바로 지석영 선생님이랍니다. 종두법에 관심을 갖고 홀로 부산에 내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종두법을 익힙니다. 그걸 임상실험을 해야하는데 선생은 충주에 있는 장인을 찾아갑니다. 겨우 2살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고자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장인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것은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약이다. 그걸 어찌 어린 처남에게 놓느냐."

그리고는 지석영을 미친놈 취급을 합니다. 그 길로 지석영은 짐을 싸고 떠날려고 합니다.

"왜 떠나려고 하는가?"
"믿지 못할 사위가 어찌 처가에 있겠습니까?"

장인은 지석영의 성의에 감탄하고 우두시술을 허락합니다.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요?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지? 전전긍긍하면서 3일을 보냈는데 드디어 우두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선생은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훗날 회고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천연두를 몰아냈습니다.

선생은 의학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글학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 때문이고 널리 교육을 펼치기 위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셨답니다. 동래 부사까지 지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도 있었지요.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고 일본의 구애도 뿌리친 째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재야에 묻혀 생을 마감하신 분이랍니다.

지천에 널려있는 무덤 속의 사람들도 선생의 도입한 종두를 어깨에 하나씩 달고 있겠지요. 그리고 천연두 때문에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선생의 '애민정신'은 죽어서도 그런 민초들과 함께 누워 있습니다.

선생의 묘 주변에는 이렇게 예쁜 꽃들이  한아름 피어 있습니다.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꽃이 표현해줍니다.
선생의 묘 주변에는 이렇게 예쁜 꽃들이 한아름 피어 있습니다.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꽃이 표현해줍니다. ⓒ 이종원

독립운동가 유상규 선생, 문병훤 선생 묘를 거치면 의학자인 오긍선선생님 가족 묘가 나옵니다.

다른 묘와 차이가 납니다. 지붕모양의 검은 대리석이 덮혀 있습니다. 오긍선선생님은  세브란스 의전의 한국 최초의 교장이었고 또 서양의학의 도입에 적극 나선 분이랍니다. 서양문물을 적극 도입한 선생의 모습처럼 묘지도 그렇게 꾸며졌네요.
다른 묘와 차이가 납니다. 지붕모양의 검은 대리석이 덮혀 있습니다. 오긍선선생님은 세브란스 의전의 한국 최초의 교장이었고 또 서양의학의 도입에 적극 나선 분이랍니다. 서양문물을 적극 도입한 선생의 모습처럼 묘지도 그렇게 꾸며졌네요. ⓒ 이종원

그 아래 동락 약수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뼈국물'이라고 표현하면서 껄껄 웃습니다. 약수가 아주 달콤합니다. 주변엔 쉴 수 있는 나무의자와 운동기구가 있네요.
그 아래 동락 약수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뼈국물'이라고 표현하면서 껄껄 웃습니다. 약수가 아주 달콤합니다. 주변엔 쉴 수 있는 나무의자와 운동기구가 있네요. ⓒ 이종원

소파 방정환선생님 묘
소파 방정환선생님 묘 ⓒ 이종원

소파 방정환 선생

어린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분이지요. 어찌보면 어린이 노조위원장이기도 하지요. 선생의 비문에 나온 글이 하도 좋아서 이곳에 일부 옮겨 봅니다.

"사람이 오래 살기를 어찌 바라지 않을까마는 오래 살아도 이 민족이 겨레에 욕된 이름이 적지 않았건만 불과 서른 셋을 살고도 이 나라 이 역사 위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나라의 주권이 도적의 발굽 아래 짓밟혀 강산이 통곡과 한탄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선생은 나라의 장래는 오직 이 나라의 어린이들을 잘 키우는 일이라 깨닫고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면서 종속윤리의 틀에 갖힌 호칭을 '어린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고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존대말을 쓰게 부르짖었으니 이 어찌 예사로운 외침이라고 하겠는가? 선생은 솔선하여 어린이를 위한 모임을 만들어 밤을 지새워 '사랑의 선물'이란 읽을 거리를 선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이를 실천하였다.(이하 생략)"


근처에 정자가 있어 한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근처에 정자가 있어 한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 이종원

문일평 선생은 민족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한 국사연구에 힘쓰신 분입니다. 방형의 묘에 꽃이 한아름 놓여 있네요.
문일평 선생은 민족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한 국사연구에 힘쓰신 분입니다. 방형의 묘에 꽃이 한아름 놓여 있네요. ⓒ 이종원

문일평 선생은 민족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한 국사연구에 힘쓰신 분입니다. 방형의 묘에 꽃이 한아름 놓여 있네요.

오세창선생묘
오세창선생묘 ⓒ 이종원

오세창 선생묘

오세창 선생은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서 접했습니다. 추사의 글과 그림을 감식하고 정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고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라고 들었답니다. 본인 스스로도 전서와 예서가 뛰어났지요. 33인의 한 분으로 구학문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전개한 분이지요.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후배랍니다.

석물
석물 ⓒ 이종원

만해선생님의 연보비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해선생님의 연보비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이종원


만해 한용운

한용운선생님 묘
한용운선생님 묘 ⓒ 이종원

일제시대 만해 한용운 선생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고 실천했던 분도 없을 겁니다. 만해를 이렇게 가까이 뵐 수 있는 것도 제게는 큰 영광이랍니다. 3.1운동 때 33인 중에 한 사람이고 일생을 저항문학에 앞장선 분이지요. 만해 같은 분이 지금도 계셨다면 분명 통일운동에 앞장섰을 겁니다.

만해 입구에 이렇게 일본풍의 조경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해 묘지 아래의 개인 묘지를 이렇게 꾸며 놓았습니다. 자연스런 우리나무를 보고 싶습니다.
만해 입구에 이렇게 일본풍의 조경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해 묘지 아래의 개인 묘지를 이렇게 꾸며 놓았습니다. 자연스런 우리나무를 보고 싶습니다. ⓒ 이종원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 이종원

죽산 조봉암

망우리 시민묘지에는 비문이 없는 묘소가 하나 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죽산 조봉암 선생님 묘소지요. 59년 진보당사건으로 간첩혐의로 사형된 후 창령 조씨문중에서 지금까지 비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이랍니다.

죽암은 비운의 정치인이지요. 제헌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까지 탄탄대로였지요. 52년, 56년 대선 때 이승만에 맞서 선전했지만 낙선합니다. 그러나 무려 200만표나 얻었기에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올라섭니다. 독재자의 입장에서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나봅니다. 호시탐탐 노리다가 기어코 진보당에 붉은 색을 입혔고 죽산을 간첩혐의로 잡아들여 사형을 언도합니다.

죽산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라고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밖에 없오.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주시오."

그러나 그 마지막 청도 거부한 채 서대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밋밋한 비문이 무언의 항의를 합니다. 'X'를 그린 마스크를 착용한 것 같습니다. 조작된 사건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빨리 복원되어 선생의 이력과 철학이 가득 채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술이나 한 병 사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마지막 유언이나 다름없는, "술이 한잔 주시오"라는 소원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선혈들과 넋이 살아 있는 공원을  둘러봅니다. 길에는 꽃가루까지 깔려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삶을 사신 분들도 있고, 목숨바쳐 국가를 위해 애쓰신 분들도 있습니다. 저승에서나마 이 꽃길 밟고 가십시오. 그리고 편안히 쉬십시요.
선혈들과 넋이 살아 있는 공원을 둘러봅니다. 길에는 꽃가루까지 깔려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삶을 사신 분들도 있고, 목숨바쳐 국가를 위해 애쓰신 분들도 있습니다. 저승에서나마 이 꽃길 밟고 가십시오. 그리고 편안히 쉬십시요. ⓒ 이종원

지도에도 보듯 저명인사들은 죽어서나마 가까운 곳에 함께 묻혀있답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지켜보고 있네요.
지도에도 보듯 저명인사들은 죽어서나마 가까운 곳에 함께 묻혀있답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지켜보고 있네요. ⓒ 이종원


망우리시민공원 교통편

교통편

1호선 청량리나 7호선 상봉역에서 버스가 있습니다. 망우리고개 넘어가기전 오른쪽에 입구가 있다.

165, 165-2, 165-3, 2, 3, 3-1, 5, 5-1 버스를 이용하세요.

/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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