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야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색깔시비를 걸어온 정치권을 향해 모처럼 할 말을 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할 때 행세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색깔을 씌우고…." 지난해 국민경선 당시 자신을 향했던 색깔론을 향해 반격하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국정원을 합법적인 활동만을 하는 탈(脫)정치 정보기관으로 개혁하겠다는 구상을, 그것도 색깔론을 가지고 무산시키려는 기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동안 상생의 정치, 국회존중을 내걸고 야당의 협조를 청하던 모습과는 달리 야당의 반대를 정면돌파하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원내 153석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은 강경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5월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고영구 국정원장에 대한 해임권고결의안 추진을 검토하겠다고 했고, 차제에 인사청문회법 개정을 검토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청와대와 한나라당간의 냉각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유동적이지만,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의 힘을 사용할 경우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에는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여야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통상적인 경험임을 생각할 때, 앞으로 전개될 정국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기조를 선택할 것인가가 주목된다.
소수파 정권의 한계
노무현 대통령에게 4·24 재보선 결과는 불행중 다행이었다. 민주당 후보가 모두 패배했다는 점에서 불행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과 정치적 코드가 일치하는 개혁당 유시민 후보가 승리한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의 민주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개혁적인 후보에 대한 지지는 살아있다는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러나 문제는 내년 17대 총선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패배가 불을 보듯 뻔함을 이번 선거결과는 보여주었다.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노무현 정부의 앞길도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장개혁, 언론개혁, 정치개혁 등 각종 개혁조치들이 소수 여당의 현실로 인해 총선 이후로 유보되었지만, 원내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내년 총선 이후 개혁정책들은 사실상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뜻대로 법 하나 고칠 수 없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한계가 뚜렷해 보인다.
그렇다고 최근 보듯이 한나라당이 언제까지 유화적인 자세를 보여줄 리는 없다.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사실상의 집권당 역할을 하려 할 것이며, 내각제 개헌을 포함해 차기 정권교체를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이대로 내년 총선을 치를 생각을 하면 노 대통령으로서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애정을 가질래야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대통령 후보 선출 이후 민주당이 보여주었던 섭섭함이야 지나간 일이라 치더라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주당이 보여준 모습은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의 정치적 효용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품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최근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을 둘러싸고 민주당 소속 정보위 의원들이 한나라당의 색깔론에 동조하고 나선 사태는 노 대통령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을 법하다.
또한 이번 4·24 재보선 결과는 민주당 간판으로는 내년 총선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나서거나 개입해서 신당창당과 같은 정계개편을 주도하기 어렵다는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인위적 정계개편이라는 야당의 반발이 있을 것이며, 이때 원내 제1당의 협력속에서 국정을 운영하기는 불가능해진다. 또한 민주당내에서도 당정분리의 훼손이라는 반발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내년 총선, 아니 정치개혁을 생각하면 이대로 놓아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통령 자신이 나설 수도 없는 딜레마가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 정치개혁에서 초연해야 하나
노 대통령은 얼마 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이 정당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것이 정치개혁의 제1과제"라고 말하며, "당원에게 당을 돌려주기로 약속한 만큼 대통령이 정치개혁에 나서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정치에 대한 대통령의 개입이 야당의 반발을 가져오고 당정분리 정신을 훼손시킬 수 있음을 고려한 입장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대통령이 정치개혁으로부터 초연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이 생겨난다. 대통령이 정치개혁에 나서서는 안된다는 말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자고 당정분리의 원칙을 도입한 정신을 생각하면 절반은 동의할 수 있지만, 정치개혁이 다른 무엇에 앞서는 국가적 과제임을 생각하면 절반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우리 정치에 있어서 정치개혁은 과연 대통령이 개입해서는 안될 정략적인 행위인가. 노 대통령이 정치개혁 문제에 관해 최근 보여준 소극적 태도는 그같은 잘못된 등식을 자인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치개혁의 과제는 정파적 의제를 넘어서는 국가적 의제이다.
그것은 노 대통령의 핵심적인 공약 사항이기도 했고, 사회세력간의 첨예한 입장차이가 드러나는 시장개혁·언론개혁 등의 문제에 비해 국민적 합의 수준이 훨씬 높은 의제이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새 정치를 통해 낡은 정치를 극복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구호가 가장 큰 공감을 얻었음을 생각할 때, 정작 집권 이후 노 대통령이 정치개혁 카드를 자신의 손에서 내려놓고 있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정치개혁의 문제에 관해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권초부터 정치개혁문제를 중심 의제로 설정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국민적 공감대가 가장 넓은 문제에서부터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소수파 정권이 취했어야 할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이 정당의 문제에 세세히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대통령의 뜻대로 정치개혁 입법을 할 수 있는 현실도 아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위치에 맞게 정치권을 상대로 정치개혁을 호소도 하고 압박도 하며,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여론을 형성해가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지난해 국민의 변화의지를 담은 노풍의 당사자였던 노 대통령 말고 그 일을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필요하면 당적 이탈 검토해야
그러나 노 대통령이 정치개혁을 이끄는, 아니 최소한 정치개혁 의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략적 행위라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당적이탈의 문제이다. 노 대통령의 당적 이탈은 자신이 제기하는 정치개혁이 정략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여 도덕적 우위 확보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4·24 재보선을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신당창당을 통한 정계개편 논의가 공론화되고 있다. 아직 그 가닥이 어떻게 잡힐 것인지는 유동적이지만, 조심스러웠던 신당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큰 변화이다.
앞으로 정계개편 논의가 발전할 경우 노 대통령의 당적 이탈 문제가 선결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설혹 신당창당이 가시화된다 해도 민주당 개혁파와 개혁당만 참여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노무현 당'이라는 평가에 머물 가능성이 크며, 이것만으로 17대 총선에서의 약진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명실상부한 범개혁세력이 참여하는 신당이 될 때라야 총선에서의 새로운 바람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 대통령이 민주당 당적을 이탈함은 물론 어느 당의 당적도 갖지않는 위치에 있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개혁파 의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탈당이 야당을 버리고 여당으로 옮기는 철새 행태로 비쳐지지 않을까를 대단히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부담을 덜어주고 새로운 판짜기의 명분을 높이기 위해 노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될 것이 예상된다. 이 때 노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는 초당적 위치로 이동함으로써 내용적으로는 새로운 판짜기의 길을 열어놓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당적 이탈은 정치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치개혁과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 사사건건 야당과 시비를 벌이고 있느니, 초당파적 입장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당적 이탈은 임기말 권력누수의 현상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원내 기반이 극도로 취약하여 어차피 원내의석 수를 다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에서는 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한 해 대선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말 그대로 승부사의 모습을 보여왔다. 상황이 어려울 때 일수록 그는 승부수를 던지며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을 보여왔다. 물론 대통령의 선택은 정치인의 그것과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같이 노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지고 내년 총선 이후에 대한 별다른 비전이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무엇인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는 선택은 필요해 보인다. 초당적 위치에서의 정치개혁 선도. 노무현 정부가 정국 상황에 운명을 맡기지 않고 지속가능한 개혁을 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이 아닐까. 4·24 재보선 결과가 노 대통령에게 던진 고민거리는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