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이었다.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전 광역시 송촌동에 있는 송용억 가옥을 다시 찾았다. 뜨락을 가득메운 영산홍이며 자산홍, 자목련 등의 자태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빗방울들은 그 아름다움의 중심에 깃든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난 내심 이 비가 그친 후 꽃의 낙화가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우리네 생도 그러하듯이 비는 종종 자신이 키운 존재인 저 식물을 자신이 망가뜨리고마는 모순을 저지르곤 한다.
한참 꽃 구경을 하다가 이 집의 안채인 호연재로 들어가 안주인이 윤자덕 여사를 찾았다. 그랬더니 며칠 전과 달리 이번엔 윤 여사의 부깥주인이신 송봉기씨가 계시는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마침 송용억(90)옹의 부인인 시어머니의 제삿날이란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윤 여사는 쪄서 껍질을 벗긴 밤 한 접시와 오미자 화채 두 그릇를 내오시고 물러가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송봉기(67)씨는 은진 송씨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분이었다. 그는 이 집에 대대로 내려온 유물들이 굉장히 많다고 했다. 그래서 대전시 둔산동에 선비 박물관을 만들어 유물 보관 겸 전시를 하고 있다고 했다.
"유물이란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좋은 법이 아니냐?"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그 분도 맞장구를 치면서도 "그렇지만 보관과 체계적인 정리의 어려움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한다.
내가 10년 전 대전으로 이사와서 맨 처음 이 집을 찾아왔을 때는 집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논들이 누런 벼를 제 품안에 가득 품고 있어 거의 옛 모습을 잃지않고 있었다.
그러나 유적 정비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원형 훼손과 난개발의 여파로 하여 지금은 아파트 숲 한 가운데 둘러싸인 '섬'이 되어버렸다. 그 섬의 이름은 동춘당 공원이다.
송봉기 관장에게 예전의 모습을 찍어둔 사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다 찍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내친 김에 송 관장님께 이 집의 내력에 대해서 물었다.
법천에 살던 소대헌 송요화가 김씨라는 사람이 살던 집을 매입했다. 그 때는 작은 사랑채인 寤宿齋(오숙재)와 안채인 浩然堂(호연당)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소대헌이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에 사랑채를 짓고 小大軒(소대헌)이라 한 게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대헌이란 '큰 테두리만 보고 작은 마디에 매달리지 않는다.(見大體不拘小節)'라는 뜻이며 오숙재란 깨고자면서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리라. 그리고 호연재란 浩然, 즉 마음이 넓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맹자>에 나오는 군자란 모름지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왜 안채 이름에 바깥 사랑채에나 붙였어야 마땅할 호연재라는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나는 송 관장에게 보물 제 209호인 동춘당과 이 송용억 가옥 중간에 있는 <夜吟(야음)>이라는 詩碑(시비)에 대해 물었다. "삶이란 석 자의 시린 칼인데/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라는 이숙희 역의 시의 한 구절이 마음에 닿았었기 때문이었다.
송봉기 관장은 그 분이 바로 이 안채의 주인이셨던 호연재 김씨라고 했다. 호연재 김씨야말로 시인이기 전에 여장부였다.
醉後乾坤闊(취후건곤활) 취하고나니 천지가 트이고
開心萬事平(개심만사평) 마음을 여니 만사가 태평일세
초然臥席上(초연와석상)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唯樂暫忘情(유락잠망정)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醉作(취작)>
이렇듯 술 마시고 나서 지은 詩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호연한 사람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호연재는 소대헌이 첩을 얻은 일을 두고도 "부부의 은혜가 비록 중하지만 제가 이미 나를 깊이 저버렸으니 나 또한 어찌 홀로 구구한 私情을 보전하여 옆 사람들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스스로 취하겠는가"라고 했다.
요새 말로 치자면 호연재 김씨야말로 선구자적인 페미니스트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