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몸서리치며 사유한 기록인 <계몽의 변증법>을 현재적 시선에서 다시 사유하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아우슈비츠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우슈비츠 이전 서부 개척의 역사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바그다드에서도 역시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기에….
지은이가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쓰는' 과정은 1인칭 자전적 서술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소개하는 1장의 전기 부분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원저자들의 목차를 따라가면서 서술한다. 따라서 계몽의 개념을 설명하는 2장부터 파시즘의 일상화를 설명하는 6장까지의 서술들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생각일 수도 있고 지은이의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둘을 구분해보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어둠을 밝히고 빛을 비춘다'는 의미라고 했을 때 빛은 '이성'의 빛에 다름 아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세계인식의 기초원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이러한 인식의 전환 속에서 계몽은 발아하게 된다. (제2장)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계몽은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인류의 희망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인간은 자연이 주는 공포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신화'에 의지하게 된다. 이 '만들어진' 신화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공포를 서서히 극복하게 되고,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과학과 지성의 힘으로 마침내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신화의 역사 속에서도 계몽은 발견된다는 이야기다. (제3장)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처럼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 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져든다고 한다. 저자들은 이를 사드의 소설 <줄리엣의 역사>를 빌어 철저하게 계산된 이성, 완전히 계몽된 이성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이 과정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가상대화 형식이라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치있게 설명하고 있다. (제4장)
이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자연이 주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이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고자 했던 계몽과, 이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또 다른 인간을 억압하는 근대 이후의 계몽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생학적이고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된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서부 개척의 신화를 위해 잔인하게 희생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수난은 똑같이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계산된' 계몽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현대사회를, 근대 철학의 산물인 계몽이라는 말로 혼접하여 야만의 시대니 어떠니 하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야만이라고 하면 아프리카 오지의 원시 미개 종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대인처럼 세련된 취향과 매너를 지닌 야만인이란 생각하기 힘든 존재일테니까.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지닌 이성적 존재들이기에 그 야만성은 원시 미개 식인종보다 더 파괴력이 큰 야만이 아니겠는가. '정의'라는 이름을 앞세워 열화 우라늄탄을 개발하고 악의 축 징벌을 위해 문명의 발상지 '천년고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야만!
이러한 야만은 현대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문화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신체와 의식을 검열하는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의 부록에 해당하는 문화산업과 유대인 문제에 관한 글에서 계몽이라는 옷을 입은 문화(산업)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합된 파시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면서 대다수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획일화시키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아도르노 만큼 디즈니 만화를 혐오한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다를까?
70년대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군사독재 시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 아니냐' 하면서도 지금 여기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똑같은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애써 무지하다.
지은이가 문화산업을 다루는 5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마음대로 불러도 되지만 DJ DOC의 <포졸이>는 왜 금지곡이 되어야 할까? <포졸이>의 가사가 저질스럽고 음란해서?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것 그 자체에 대해서 금지라는 족쇄를 채우지는 않는다. 촌스러운 것으로 치자면야 <허리케인 박>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을까? 문제는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누구를 겨냥하느냐가 문제일 뿐! 이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라는 고상한 취미 역시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언론매체에서 예민한 정치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경상도/전라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경상도 출신인 필자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글이라도 하나 올리면 당장 "너, DJ 광신도지?"라는 욕설이 난무한다. "전라도/경상도라는 지역주의는 지배집단의, 파시즘의 산물이다" 등등의 비판적 사고들은 이 광란의 장에 들어설 틈이 없다. 온 국민의 지역주의화!
동성애나 이주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동성애나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룬 기사들에 딸린 댓글들의 수준을 보라. 인간 이성의 동물수준화! 스스로의 합리성을 믿어의심치 않는 '합리적 다수'가 패거리 문화에 기대어 일류/삼류 대학을 구분하고, 특정 지역 출신을 소외시키고, 동성애자를 조롱하고, 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학대하는 현실은 야만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것들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자명한 것으로 알고 지나갈 뿐이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맹목적 신뢰! 금지된 것들에 대한 자발적 자기 검열과 반성하지 않는 이성 속에서 파시즘의 신화는 새롭게 부활한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파시즘!
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의 극복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스스로를 완전히 자각하고 힘을 지니게 된 계몽만이 계몽의 한계를 분쇄할 수 있을 것"(<계몽의 변증법>, 280쪽, 문예출판사/1995)이라는 원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지은이도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아마도 무리하게 '에필로그'를 삽입하는 것보다는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친 듯한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쨌거나 국문학 전공자인 지은이가 학위논문을 앞두고 난해한 철학책을 '리라이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 그지 없는데, 그 스스로 어떤 형태로든 학위 논문에 반영할 생각이라니, 그의 학위논문이 새삼 기다려진다. 필자에게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