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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오구굿 굿상
동해안 오구굿 굿상 ⓒ 김광재
봄비답지 않게 많은 비가 종일 내린 4월 29일 오후 경북 울진군 후포면 삼율2리 백사장에 굿청이 차려졌다. 굵은 청죽으로 뼈대를 세우고 천막을 쳐서 만든 굿청 안에는 바다쪽으로 상을 차려 놓았다.

제단 중앙에는 길대부인, 오구대왕, 바리데기를 그린 무신도가 걸려 있고 그 아래 망자의 지방이 있다. 1m 높이 쯤 되는 굿상에는 종이꽃[紙花]과 떡 과일 포 등을 차려 놓았고 그 아래 소반에는 망자의 영정과 촛대, 향로가 있다.

화려하고 다양한 종이꽃 눈길

제단 오른쪽에는 용선(龍船), 왼쪽에는 원등이 걸려 있는데 모두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것이다. 동해안 굿은 화려한 색깔과 다양한 모양의 종이꽃이 인상적인데, 무당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다.

오후 5시 30분 부정치기를 시작으로 굿판이 벌어졌다. 백지를 태우고 바가지에 담긴 맑은 물을 굿청 여기저기에 뿌려 부정한 것을 씻어내는 의식이다. 장구, 징, 꽹과리 장단에 맞춰 무녀가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골매기굿을 하는데 골매기란 마을 수호신이다. 마을을 지키는 신이 문을 열어주어야 죽은 넋이 굿을 받으러 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부정치기 다음 골매기굿을 먼저 한다. 남색 쾌자를 입고 연두색 띠를 두른 무녀가 부채와 흰 수건을 들고 노래와 춤을 춘다.

낡은 철선에 물 새어 들어 12명 익사

"……간 날은 있건마는 돌아올 날 언제인가 돈벌어 온다고 나가놓고 백수가 흩날리는 엄마를 두고 자식이 먼저 가니 기가 찰 일이다…아이고 불쌍한 것 이 영가야…"

무녀의 사설에 망자의 노모가 영정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한다.

송명희씨의 초망자굿
송명희씨의 초망자굿 ⓒ 김광재
지난 3월 2일 독도 인근으로 홍게잡이 나갔던 96t급 낡은 철선 신명호에 물이 차 올라 배가 가라앉는 사고가 일어났다. 뱃사람 12명은 모두 사망했다. 이날 굿을 받은 망자는 이 배에 탔던 권영만(48)씨다. 그는 이 굿판에서 살았을 적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안동권씨 갑오생 영가'로 불렸다. 유족으로는 노모와 부인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남매가 있다.

동해안에서 벌어지는 굿은 별신굿과 오구굿으로 크게 나눠진다. 별신굿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기 위해 정기적으로 벌이는 마을굿이다. 축제 성격의 별신제와 달리 이날 벌어진 오구굿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원혼의 한을 풀어주고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슬픈 굿이다. 오구굿을 통해 무당은 영혼을 불러 맺힌 것을 풀고,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이별의 슬픔을 달랠 수 있도록 해준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한 오구굿은 보통 골매기굿 다음에 넋건지기를 한다. 망자가 미혼일 경우에는 망자 혼례식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치러진 신명호 선원 합동 위령제 때 넋건지기를 했기 때문에 이날은 생략했다.

"슬픈 굿이지만 갈때는 웃고 춤추며"

주무(主巫)가 굿받으러 오라는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무녀들은 춤을 춘다. 이어서 조상굿과 세존굿이 벌어졌다. 조상굿은 망자 집안의 모든 조상을 모셔다 위로하는 거리이고, 세존굿은 부처의 가호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거리다. 후반부에 가서는 '이 굿은 슬픈 굿이지만 극락갈 때는 웃고 춤을 추며 가야 한다'며 한강수 타령 풍년가 등 흥겨운 민요를 이어 불렀다.

각 거리마다 대체로 처음에는 망자의 처지를 애달파하는 내용의 노래가 불려지고 마지막에는 흥겨움으로 끝난다. 그리하여 유족들을 슬픔에 젖어들게 했다가 풀어주는 구조가 게속된다. 무당은 울리고 웃긴 뒤 "울다가 웃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며 농을 던지기도 했다.

"오소오소 돌아오소/저 한바다가 물이 깊어 못오시오/ 배가 고파 못오시오 /목이 말라 못오시오 /젖은 옷 갈아입을 옷이 없어 못오시오…" 망자의 넋을 부르는 구슬픈 노래로 초망자굿이 시작됐다. 이 거리는 망자의 넋을 불러 가족들과 만나게 해주는 거리이다. 굿판에서는 소쿠리와 종이로 만든 신태집에 망자의 넋이 깃든다고 믿는다.

망자의 넋을 불러 못다한 말 전해

무녀가 동이를 입으로 물고 있다
무녀가 동이를 입으로 물고 있다 ⓒ 김광재
"…배 밑에서 물이 올라온다/ 바가지로 퍼내면서 /여기서 내가 죽나/ 용왕님요 살려주소…삼율2리에도 내 누울 자리 천지구만 /만경창파에 수중고혼이 웬말이냐…" 무녀는 망자의 처지가 되어 넋두리를 한다. 또 유족들에게로 가서 차례로 귀에다 대고 몇마디 말을 한다. 망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것이라 한다.

무녀는 영가에게 이제 원을 풀고 다 누리지 못한 목숨과 복은 가족들에게 앞앞이 나눠주고, 극락에서 편히 쉬라고 말한다. 초망자굿도 마지막에는 흥겨운 노래로 끝을 맺는다. "영가를 위해서는 웃는 것도 부조다. 웃고 줄기는 모습을 보면 편안히 간다"며 무녀가 부추긴다. 구경나온 마을 할머니들도 흥겨운 노래에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한다.

초망자굿의 주무는 송명희(50)씨이고 남편 김장길(57)씨가 장고를 잡았다. 한창 흥이 오르자 두 사람은 다소 농도짙은 농담까지 주고 받는다. 나머지 무당들과 관객들도 거들고 나서며 웃음판이 벌어졌다.

이날 굿판에는 모두 10명의 무당이 나왔는데 김씨 부부가 이날 오구굿 전체의 리더격이다. 송씨는 경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영해별신굿 기능보유자 송동숙 옹의 딸이다. 송옹은 고령에 병을 앓고 있어 김장길씨가 굿패를 이끌고 있다. 동해안은 전통적인 세습무 지역인데 송동숙패는 김석출패와 함께 동해안지역의 대표적인 굿패다. 이 지역 굿패는 평소 흩어져 살다가 큰 굿판이 있으면 모여서 판을 벌이는데 대부분 친인척관계로 연결돼 있다.

"님 건질 조리는 안 파시오"

초망자굿 다음에는 놋동이굿이 펼쳐졌다. 장수굿, 군웅굿으로 불리는데 월령체 무가를 불렀다. 정월령 사설은 이렇다. "여보시오 복조리장사요/님 건질 조리는 안파시오/님 건질 조리만 판다면/천리도 따라가고/만리도 따라가고/가다가 애말라 죽으면/넋이라도 따라가고…"

바리데기가 그려진 무신도
바리데기가 그려진 무신도 ⓒ 김광재
무가 다음에는 "금일영가 나이가 한창이라 이렇게 논다"고 하고는 유행가 몇 곡을 불러 젖혔다. 유족인지 친구인지 함께 춤도 추고 굿청은 잔치판 분위기가 됐다. 노래가 끝나고 무녀가 놋동이(지금은 재질이 놋쇠가 아니라 스테인레스다)를 입으로 물어 올렸다. 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묘기라 한다.

오전 1시 30분, 강릉단오제 기능보유자인 빈순애(44)씨의 발원굿이 시작됐다. 이 거리에는 장편서사무가인 <바리데기>를 부른다. 이날 바리데기는 2시간 40분이 걸렸다. 길게하면 여섯시간까지 간다고 한다. 이야기의 줄기는 같지만 명칭과 내용은 지역과 구연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이날 불려진 바리데기는 다음과 같다.

불라국에 오구대왕과 길대 부인이 살고 있었다. 부부는 딸만 여섯을 낳았다. 그러던 차에 수미산 팔봉대절에서 100일 기도를 드려 아이를 잉태하지만, 낳고 보니 또 딸이었다. 대왕은 실망하여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명한다. 길대 부인이 버렸다 얻는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버르데기' 라고 짓고 산에 갖다 버리니, 봉황이 나타나 채 간다.

세월이 흐른 뒤, 오구대왕은 큰 병에 걸렸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병을 고치려면 서천 서역국에 가서 약수(藥水)를 구해 와야 한다는데, 여섯공주는 모두 핑계를 대고 가지 않는다. 그때 부인이 꿈에 계시를 받고 산으로 가서 버르데기를 찾는다. 버르데기는 남장을 하고 자청해서 약수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판염불을 하는 김장길씨
판염불을 하는 김장길씨 ⓒ 김광재
버르데기가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서천 서역국에 당도하니, 약수를 지키는 동수자가 버르데기가 여자인 것을 알고 자기와 결혼해야 약수를 준다고 하였다. 버르데기는 그와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은 다음 비로소 약수와 신비한 꽃을 얻어 불라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버지인 오구대왕은 이미 죽어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버르데기가 죽은 아버지의 입에 약수를 넣자 죽었던 대왕이 살아난다. 버르데기 일가는 무신(巫神)과 별이 되었다.


2시간 40분동안 계속된 <바리데기>

죽음을 관장하는 무신의 유래를 이야기하는 바리데기 설화는 신화, 영웅담 등 여러 가지 모티프가 포함돼 있다. 바리데기의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승과 단절해야 한다는 이중적 심리가 함께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빈씨는 여섯 공주가 모두 거절하는 장면을 노래하다가 "옛날에는 딸은 전부 도둑년이라 했지만 요새는 안그래. 이제는 아들 낳으면 리어카 타고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말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대부분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현대에 굿거리도 세태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새벽 4시 반이 되자 무당들과 유족들도 잠시 눈을 붙이러 들어갔다. 오전 6시가 넘어 하늘은 화창하게 개었다. 김장길씨의 시무풀이(신무풀이)와 판염불이 이어졌다.

이별의식…뒤돌아 보지말고 떠나가라

신태집을 잡은 유족이 통곡하고 있다
신태집을 잡은 유족이 통곡하고 있다 ⓒ 김광재
굿판은 이별 의식인 너름받이로 넘어갔다. 작은 상에 신태집을 올려 놓고 망자의 숙모가 신태집을 잡게 했다. 망자의 숙모는 울음을 터뜨리며 망자의 넋이 들어온 것처럼 행동을 했다.

신태집을 잡고 흔들고 넋두리를 한다. 무당은 이제 그만 저승길로 가라고 재촉을 했다. 다음으로 무녀는 종이인형을 싸둔 돗자리를 풀고 지화 한송이에 인형을 붙여 유족을 차례로 만나 이별하는 의식을 한다.

다음에는 망자가 마음 편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화려한 군무와 흥겨운 노래가 뒤따랐다. 무녀가 모두 지화를 뽑아들고 춤을 추며 꽃노래를 부르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수이수이 떠나가라는 뱃노래를 부른다. 이어서 초롱과 등을 놀리면서 노래를 부른다.

용선에 맨 흰 천을 두갈래로 찢어 저승으로 떠난 혼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을 치른다. 그 후 지방을 꽂아 두었던 쟁반에 담긴 쌀에 새발자국 형상이 나타난 것을 보여주며 저승으로 잘 갔다고 한다.

지화 용선 등 굿에 쓰인 장식물들은 바닷가에서 모두 태움으로써 이날 오구굿은 끝났다. 동해안에도 굿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유족 한사람은 "보상금이라도 좀 나왔으니 이렇게 굿을 했지 그렇지 않다면 수백만원씩 드는 굿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 송명희씨는 이번 굿처럼 제대로 하는 굿은 1년에 서너차례 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굿이)내가 갖고 가기에는 아까운 것인데,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꽃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무녀들
꽃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무녀들 ⓒ 김광재
밤새 벌어졌던 굿이 끝난 오전 11시 하늘은 맑게 갰고 바다는 잔잔했다. 후포면 대율2리는 다시 인적조차 뜸한 조용한 바닷가 마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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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쳤습니다.오마이뉴스 대구/경북지역 운영위원회의 제안으로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대구경북지역 뉴스를 취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 뉴스가 이 지역에서도 인정받는 언론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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