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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왕곡마을.

마을을 둘러싼 다섯 봉우리가 포근하게 외지에서 찾아온 낯선 손님을 보듬으며 수줍은 듯 누워 있다. 이름하여 두백산, 공모산, 순방산, 제공산, 호근산으로 불리우는 다섯 봉우리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 고성 산골짜기 왕곡민속마을은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 한 명인 함부열이 간성에 은거하면서부터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몇 년이나 흘렀을까?

▲ 왕곡마을 전경
ⓒ 최승희
오봉리 왕곡마을의 지금 형태가 완성된 것은 19세기를 전후하여 북방식 전통한옥들이 한 채 두 채 지어져 집성촌을 이루고 내려오면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물론 현재도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생활촌이며 지금까지도 북방식 가옥과 초가집을 원형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하며 내려오고 있는 국내 최초의 전통건조물 보존 지구이다.

마을 뒷산인 오음산 자락아래 170년이 넘은 고택을 이젠 홀로 지키고 있다는 강릉 함씨가의 할머니는 낯선 방문자를 반갑게 맞아주며 마을의 역사를 조막조막 읊어주신다.

"이 모태(동네)에서 벌써 내가 5대째 살거든. 시방(지금) 이 동네사람들은 전수(모두) 강릉 최가랑 함씨들이 대부분인데. 여태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지. 원래 이 동네가 없어져도 진작에 없어질 동네 였는데. 그 전쟁 난리 통에 안팎으로 온갖 동네들이 다 불타고 없어지고 죽고 그랬거든. 근데 이 동네만 정말 똑때이(똑똑하게) 살아 남았어. 왜 그란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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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모두 다) 이 동네 빙그르르 둘러싸고 있는 저 산봉우리 다섯 땜에 살은거지 뭐. 폭격을 해도 다 산봉우리 에다 갔다가 맞지~ 마을은 멀쩡했거든. 글쎄 그게 다 조상 잘 모신 동네 어르신 덕이라니."

▲ 170년이 넘은 고택과 주인 할머니
ⓒ 최승희
할머니는 이제 일흔을 넘기고 계셨다. 5대째 이 한집에서 살아오면서 강릉 함씨 며느리로 이곳에 들어와 한 평생 다른 곳에 한번 나가보지 못하셨다고 하신다. 몇 해전 같이 사시던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곤 줄곧 혼자서 이 큰 집을 간수하고 계신다고 했다.

"근데 아이들이 말이야. 도시에 나와 살아 보자고도 했는데. 난 죽어도 거기 못 있겠데. 그기 사람 사는 기 아니야. 어데가 어덴지도 모르겠고 전수 (모두) 빙 둘러 담벼락 쌓아놓고 집안도 안 보이지 마당도 없지. 나는 아예 갑갑해 미치겠더라구. 여기 봐. 이렇게 넓은 마당 가진 사람 울 나라에 대통령 빼고 어디 있나. 이게 그냥 보기엔 이래 뵈도 거뜬히 한 이백 평은 족히 되거든."

▲ 주인할머니와 할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은 고택자물통
ⓒ 최승희
자식들은 다들 커서 지금은 도외지로 다 나가고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는 할머니는 평생 이곳에 살아서인지 적적하지 않다는 말씀과 함께 마을 중앙에 있는 함희석씨 효자비가 가문의 어르신이라며 마을자랑이 한창이셨다.

또 이곳 마을이 차들이 다니는 도로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초가집을 헐어내는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큰 다행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지난 96년에 고성에 큰불이 났었을 때는 괜찮았느냐고 물으니 조상들이 보살펴서 다행히 불길이 피해 갔다면서 크게 웃으신다.

할머니가 지내고 계신 집은 왕곡민속마을의 대표적인 가옥구조로 안방과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하나로 붙어있고 부엌에 마굿간을 덧붙인 함경도를 비롯한 관북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고리에 달린 자물통도 어르신들에게 물려받아 몇 대째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 마을을 돌아보며
ⓒ 최승희
"그기 그래뵈도 꽤 오래 된 것이라. 우리 할아버지들이 쓰시던 건데 날 그게 젤로 맴이 편해. 요즘 것들은 고장도 잘나고 가볍고 믿음이 안가니. 사람들이 예전 거라면 못쓰는 골동품 쳐다보듯이 하는데. 예전 것들이 사실 더 좋은 게 많은 법이지. 요즘 낫들 봐. 풀이나 조금만 벨라치면 다 이빨이 문드러지고."

이제 마을엔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여름엔 가끔 도외지로 나간 식구들이 찾아와 동네가 시끌벅적 할 때도 있지만 그때만 지나면 늘 동네는 한결같이 마을 뒷산 산봉우리처럼 조용하단다. 말씀을 듣고 있다가 할머니의 유일한 식구인 황구 한 마리가 컹컹하고 짖었다. 할머니가 이내 시원한 물을 한 잔 들고 나오시는데...

"이 동네가 다 좋은데. 우물이 본래 없어. 땅 밑에 물이 없는 셈이지. 지나가는 하천은 있는데 땅속에 물이 없다고 하데. 땅속에 물이 흐르지 않으면 뭐 오래 산데나. 늙은이가 오래 살아봐야 뭐 그게 그거지."

▲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풍경
ⓒ 최승희
사실 할머니 말씀처럼 오봉리 왕곡마을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동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비전문가인 낯선 이방인의 눈에 비친 단순한 풍경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은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 25동과 초가집들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밀집,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문화재 관계자가 이곳 왕곡민속마을을 찾아 전통가옥을 둘러보고 극찬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실은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관광유적지이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해가 어스름하게 지게 되어 고만 인사를 드리고 내려 오면서 다시 한번 마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할머니가 사는 마을 뒤쪽 오음산은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위에 장현리, 근성 왕곡리, 적동리, 서성리, 탑동리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여 오음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어 마을주민들은 집을 편리하게 보수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할머니도 그런 말씀을 하셨듯이 뜨신 군불을 떼던 구들장에서 자다가 보일러에선 불편해 못 주무시겠다고 하신 것을 보니 그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오늘 이 마을을 있게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북방식 고택에 사는 주민들의 집
ⓒ 최승희
왕곡마을의 특이한 점은 전통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것 외에 더 흥미로운 것이 있었는데. 그 것은 공동체와 사생활이 정확하게 구분된 가옥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마을 안길과 연결되는 앞마당은 개방적이고 대부분 공동 작업공간인 반면, 뒷마당은 뒷담길에서 내려다보더라도 지붕만 보여 개인의 사생활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뒷마당은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해 뒷마당을 여성의 전용공간으로 할애한 점도 특색있는 구조라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나이지만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가 살던 동네에 이런 훌륭한 문화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참 안타까우면서도 내심은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만든 문화를 파괴하는 것 역시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 북방식 가옥구조를 갖춘 집들
ⓒ 최승희
난 오랜 세월 동안 불편한 생활을 적응하고 참아내며 지금까지 마을을 보존해 온 동네 어르신들을 보면서 한없는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조그만 마을 입구를 돌아 나오는데 논에선 동네 아저씨가 마을 앞 논에서 모내기를 한창하고 계셨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붉은 기운이 하늘을 덮으려고 할 때 문득 배웅까지 나오시며 반갑게 낯선 이를 보내주시던 오음산 자락 함가댁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요즘 사람들 집 짓는 게 영 글러 먹었어. 옛날엔 말이지. 우리 할아버지들이 집 지을 때는 나무들을 깎아서 서로 짜 맞추고 그렇게 집을 지었거든. 근데 요즘 아들은 그저 나무에 못만 딱딱 박아놓으니 그게 몇 십년이나 가겠어. 정성스레 지은 집은 절대 안 무너지는 법이거든."

나중에라도 친구들과 함께 오면 민박으로 방 하나를 공짜루 내주시겠다며 웃으며 배웅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뒤로 하고 왕곡마을을 돌아 나서는데 마을 뒷산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웅~웅하며 알수 없는 아쉬운 바람소리가 내내 내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교통과 주변 볼거리

교통안내

송지호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간성읍 방향으로 가다 공현진교
건너기 전에 좌회전해서 1.3km 들어가면 왕곡 전통마을이 보인다.
속초 ↔ 간성간 버스로는 오봉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들어간다(30분소요). 이곳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관광안내 : 고성군 문화관광과 033) 680-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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