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표지
책표지 ⓒ 한길사
이 책은 김상봉 선생이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한 편의 시입니다. 시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는데 무슨 시냐고 물을 수 있지만 시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편의 시입니다.

그리고 시 중에서도 주체의 자기반성을 드러내는 서정시입니다. 그것은 책의 맨 앞부분 '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라는 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지금 이 땅에서 깨어있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주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서정시는 작게 보면 한 개인에서 크게 보면 근대인이라는 보편적 주체의 자기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 중에 왜 하필 비극일까요? 그것도 그 먼 옛날 고대 그리스의 비극일까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비극은 "슬픔의 자기반성"(40쪽)입니다. 우리의 역사 또한 슬픈 기억으로 이어져 왔기에 그런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속의 슬픔의 깊이만큼 세상의 깊이를 재보고 그 심연을 메울 힘을 찾으려는 것이지요. 또한 비극은 가만히 앉아서 관람하는 게 아니라 "고귀하고 완전하며 위대한 행위를 똑같은 행위의 방식으로 모방함으로써 그것에 직접 참여하는 것"(49쪽)입니다. 고귀하고 위대해 지려는 몸짓이죠.

비극은 슬픔에 묻혀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반성하고 위대한 행위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이미 자기를 주체로서 자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 실례입니다"(250∼251쪽).

지은이소개

김상봉은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괴팅겐·프라이부르크·마인츠 대학에서 철학, 서양고전문헌학, 신학을 공부하고 칸트의 <최후유고>(Opus postumum)에 대한 연구로 1992년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와 '학벌없는 사회'(antihakbul.org) 사무처장을 지냈으며, 현재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길사에서 펴낸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 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나르시스의 꿈 -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을 비롯하여 <세 학교의 이야기>가 있고, 옮긴 책으로 <칸트 순수이성비판 입문>이 있다.
김상봉 선생은 그리스 비극에서 고대 그리스인이 가졌던 정신의 위대함과 행위, 정치적 자유를 봅니다. 개인이 자유로우려면 스스로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만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며 무조건 혐오하거나 귀찮아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들 자신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질"(103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극이 어떻게 그리스인들에게 정치적 자유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었던 것일까요? 비극은 주체의 고독한 독백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습니다. 영웅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문제(운명이나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고통에 맞서 그것을 극복하리라 마음먹었을 때 영웅은 탄생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랑의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가 그런 영웅입니다. 운명의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건 결말일 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노력했고 그런 행위가 그의 위대함을 증명합니다.

이런 비극은 나를 벗어나 타인 속으로 '건너감'을 통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삶을 바꿉니다.

"비극이 수행하는 것은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대립상들을 드러내 보이고 하나의 대립항으로부터 다른 대립항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서 삶의 전체상을 우리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있을 때 각자는 고립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만남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비극시인들이 보여주려 했던 총체성이란 바로 이런 이행 속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258쪽).

이런 만남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려 합니다.

"그것은 삶의 총체성을 단순히 만남의 전제로서 즉자적으로 정립된 것, 완성된 것으로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체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공감 속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이끌어 올리려 했던 것입니다"(249쪽).

선생은 소위 '최근의 철학경향'이 얘기하는 내용을 전혀 새롭지 않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나온 책 <나르시스의 꿈>과 비슷하게 이 책은 기존의 철학으로도 차이와 해체, 생성을 얘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체되고 거부되는 보편성과 총체성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선생은 비극의 대화가 단순히 지식을 교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격렬히 논쟁했다고 얘기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대변하는 주인공들이 적대적 대립상황 속에서 치열하게 시비를 논"(242쪽)했습니다.

이런 대화를 안틸로기아(antilogia)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비극의 안틸로기아는 아곤(agon)의 정치, 생성의 정치를 연상시킵니다. 더 직접적으로 선생은 "니체와 들뢰즈의 철학이 과연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하여 그들이 허무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노래하는 파랑새처럼 행복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302쪽)라고 묻습니다.

선생은 자신을 반성하고 총체성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보다 MTV의 빠른 화면에 익숙해져 감각의 늪에 빠져버린 사회에 경고를 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총체성의 해체가 시대의 운명이 되어버린 시대에는 해체된 총체성과 소외된 주체성을 노래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보편적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주체성과 보편성을 매개하는 것은 단순히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정치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편에서는 시민들 각자가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가 모여 시민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 또한 절실하게 요구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229∼230쪽).

지금 당장 되짚어 봐야 할 중요한 경고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강하다보니 때론 니체의 철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생은 "니체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참여가 자기의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295쪽)라고 얘기합니다. 더 심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니체는 남들이 다 아는 것, 즉 슬픔보다 기쁨이 더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찌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지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작해야 스스로 강해지고 삶을 긍정하라는 뻔한 설교말고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는데, 그런 말이야 억울하면 출세하고 힘없으면 태권도 배우고, 배고프면 빵 사먹고, 빵 사먹을 돈조차 없으면 우물가에 가서 물배라도 채우라는 식의 설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알량한 지혜로 남들은 고사하고 어떻게 자기 한 몸인들 구원할 수 있었겠습니까?"(303쪽).

결론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디오뉘소스적 긍정이란 쉽게 말하자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긍정"(314쪽)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렇게 단순하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무조건 디오뉘소스를 따를 것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이 모두 필요하다고, 근대인이, 소크라테스적 앎이 지나치게 억압해 온 디오뉘소스적인 것을 다시 살릴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포스트주의에 대한 거북함이 니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 같습니다.

한 쪽을 사랑하면 다른 쪽의 가치를 무시하진 않더라도 자꾸 잊어버리게 되나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냥 아픔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은 많은 기쁨들이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슬픔'이라는 단어만으로 역사를 바라보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김상봉 선생은 그리스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리움이 이 땅의 경험에 대해 괴리감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이런 괴리감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도 드러납니다).

비극이 아니라 서정시라는 것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책은 음악을 들려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저/한길사/2003)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한길사(200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