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연인
현대인들은 너무 풍요롭기 때문에 소박함과 검소함의 미학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갖은 것들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들만 싸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씨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혹은 속박 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동지로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연인이고,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야생초와 친구처럼 대화하고 또 풀잎이 하나라도 시들시들하면 괜히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을 아파하니, 그런 의미에서 황씨를 자연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눈 뜬 죽음
황씨는 유학생 중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젊은 시절의 아까운 청춘 13년을 감옥이라는 곳에서 지냈다. 그건 분명 평범하지 않은 삶이었고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감옥행이었다.
눈뜬 죽음과도 같은 시간들 속에서 유일한 출구는 야생초였다. 야생초는 그에게 삶의 진리를 알려준 교과서같은 존재이기도 하며, 답답한 마음을 터 놓고 함께 자랄 수 있는 옥중 동지인 셈이었다.
그는 야생초를 호기심으로 기른 것이 아니다. 동생에게 보내는 <야생초 편지> 속에는 야생초와 맺는 인연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그의 생활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느낄 수 있다.
며느리밑씻개의 의미와 모듬풀 물김치의 새로운 맛, 가장 완벽한 야생 약초인 쇠비름의 발견 등이 그에게는 칠흙같은 감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생명수였던 것이다.
감옥이라는 자유가 구속된 공간에서는 무소유라기보다는 '박탈'이라고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죄인에게 호의적일 수 없는 곳이기에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아쉬워하는 마음마저 퇴색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박탈이라는 답답함 속에서도 황씨는 웃을 수 있었다.
그는 비옥한 땅속을 뚫고 나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그 풀들을 닮고 싶었고 구석구석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성기관지염을 고치는 최고의 약이었으며 철마다 색다르게 맛 볼 수 있는 물김치도 그에게는 매력적인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씨앗을 구했고, 야생초들을 길렀으며 감방 안에도 갖다놓았다.그런 의미에서 황대권씨는 야생초에 집착을 했던 것 같고, 무소유보다는 소유에 더 기울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살짝 든다.
'흐름'의 미학
<야생초 편지>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았다. 어떤 일이 이뤄질 때 인간의 의지가 기여하는 부분은 작고 미약하다. 산다는 것은 결국 '흐름'을 읽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버릴 때 가능하다.
나를 버리고 자연에 의지하게 되면 그들의 순리를 알게되고 그 순리 속에서 숙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 역시 자연의 순리대로 살다보면 문제가 없거늘 자연을 잊고 정복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오묘한 삶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정신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 감옥에서 유일하게 그가 깨달은 것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황씨는 보고싶은 식구들과 함께 따뜻한 방에서 텔레비전도 보고 친구들과 만나 거나하게 술 한잔도 기울이며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또다시 평범하지 않은 일에 뛰어들었다. 감옥생활에서 터득한 잡초 철학을 바탕으로 한 생태공동체의 실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삶은 진정으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