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석철(79)옹의 얼굴에선 목수 아닌 날카로운 검객(劍客)의 눈빛을 본다. 외길 60여년, 나무를 대할 때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결해 온 인생, 그러다 보니 지금은 신기(神技)와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선 달인이 되었다. 목공(木工)일이라면 젊었을 때처럼 긴장하지 않아도 어려움 없이 순리대로 처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설옹은 한쪽 눈, 한쪽 다리마저 성치 않다. 기력이 쇠잔해서가 아니라 30여 년 전 아름드리 나무에 깔리는 통에 다리를 다쳤다. 부러진 상처는 어렵사리 이어졌지만 10센티 가량 짧아졌고 언젠가는 쪼개던 나뭇조각이 튀어 한쪽 눈마저 앗아갔다. 이쯤 되면 나무는 원수가 되어야 맞지만 버리지 못하고 이제는 정이 들어 몸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집안엔 온통 나무 천지다. 사람이 제대로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재목들로 가득하다.
“저놈의 나무를 보면 서글퍼 죽겄어. 저것들은 나무가 아니라 내 오장육부랑게. 저놈들을 두고 세상 뜰 일을 생각허면 가슴이 미어져.”
자식의 머리라도 쓰다듬듯 재목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17세 때 목공장(木工匠)의 도제가 되어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뼈빠지게 일을 해도 먹고살기 힘들던 때라 그래도 농사일보다 벌이가 괜찮다는 목공일을 배우기 위해 돼지 한 마리 판돈을 바치고 견습공으로 시작했는데, 평생의 직업이 돼버렸다. 그동안 시속이 변하여 호마이카며 티크장이 온통 가구의 자리를 점령해버리자 그는 직업을 잃고 다시 어린 시절처럼 굶주리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한 때는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바둑판을 만들어 들고 서울로 올라가 길거리에서 팔아보기도 했지만 차비만 축 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호마이카나 티크장을 맨들라먼 내가 더 잘 맨들지, 벌이도 더 낫고, 하지만 어찌 그런 짓을 해. 흉내 내기도 싫어. 뻔들뻔들 날림으로 하는 일에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질 않아.”
끈질긴 고집으로 살아온 한 평생. 96년 상공부는 그에게 조선가구 제작분야에서 국내 단 한 명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명장’칭호를 수여했고, 2001년에는 국가지정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조선가구는 소탈하고 꾸밈새가 없다. 호사스러움을 경계했던 조선 선비들의 철학을 반영하듯 지나친 광택이나 색채를 피해 동백기름, 잣기름 등만을 먹여 나무 결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수직, 수평으로 달리는 선들은 모서리를 시원스럽게 휘감아 돌고, 그 선들이 경계를 이룬 황금비의 면 분할은 몬드리안의 그림에 비길 바 아니다.
이음매엔 일체의 쇠못을 쓰지 않는다. 오직 짜 맞춤으로 판재와 기둥이 만나며, 못을 써야 할 자리엔 풀칠을 한 대못(대나무)이 들어가고 결국엔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다. 금속 장식 역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음매의 꼭 필요한 자리에 견고함을 더하면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빛낸다.
설석철옹은 조선가구의 전통적 제작기법을 지키며 평생의 고단함을 이겨 왔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하고 같이 숨쉬고, 함께 살기 좋은 것(가구)을 맨들라고 했제”
예로부터 선인들은 가구를 만들 재목은 방바닥에 깔아 놓고 몇 년씩 함께 거쳐하다가 사용하곤 했다.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뒤틀리지 않고 갈라지지 않은 것만을 골라 재목으로 삼는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재목으로 만들어야 집, 방안의 온도며 습도에 적응되어 살아 숨쉬는 훌륭한 가구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원목을 구해오면 이를 켜서 5-10년 동안 창고 안에 묵혀 둔다. 그래야 쪼개질 것, 뒤틀릴 것들이 미리 가려지고 진이 빠진다는 것이다. 나무를 빨리 이용하려면 쪄서 써야 하는데, 그는 그걸 피하여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린다. 수입목재도 쓰지 않는다.
“물 건너온 것은 우리 풍토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남들은 검은 색 목재를 대부분 수입목인 흑단을 쓰는데 그는 구하기도 무척 어려운 한국산 먹감나무만을 쓴다.
그는 나무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아버님은 지금도 어디에 좋은 나무가 있다는 소리만 들으시면 빚이라도 내서 달려가 사오시죠.”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막내아들 이환(36)씨의 말이다. 5남 2녀 중 아들 셋( 연운, 영섭, 이환)이 설옹의 뒤를 따르고 있다. 아들들은 건축, 가구디자인 등을 전공해서 아버지의 작업에 현대적 가치를 접목시켜보기도 하지만 전통성을 살리고 발전시키는 데는 아버지보다 더한 고집쟁이들이다.
세월의 무게에 많이 눌려왔을 그의 어깨가 결코 무겁게 보이지 만은 않는다. 혼자 걸어온 60년 외길 인생에 든든한 동반자가 한꺼번에 셋이나 있으니… .
장성 톨게이트에서 장성 읍내 군청 방향으로 10여분 정도 진입하면 찾을 수 있다.
설옹의 집이자 작업장인 ‘장성공예사'는 읍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곳을 거쳐 돌아볼 만한 곳으로 읍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백양사가 있다. 먹을거리는 톨게이트에서 읍내로 들어서자 마자 왼쪽에 보이는‘재성이네 손맛 추어탕’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한 그릇에 5천원, 밑반찬으로 직접 담근 5-6가지의 젓갈이 색다른 미각을 돋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