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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인생 여정 중에 우리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행사들을 치른다. 그리고 그런 행사들은 으레 희로애락의 감정을 동반한다. 인생에 탄생이나 결혼식 같이 기쁜 일만 있으면 좋으련만 병치레나 죽음과 같이 슬픔을 추슬러야하는 일들도 있으니 고약하다.

주어진 수명을 다 마치고 편안히 영면한 분의 장례식에 다녀 온 후엔 별다른 후유증을 앓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대한 경외심과 경건한 자세를 다짐하며 힘을 얻어 온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고, 기막힌 사건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장례식 후엔 알지 못할 어두운 기운이 한동안 주변을 맴돌아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지금까지 조문(弔問)하러 갔던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인데 그 중 두 번은 일본에서 였다. 그리고 기막히게도 그 두 번의 조문이 모두 올해 1월에 있었던 일이다. 게다가 더 기막히는 것은 모두 ‘어린 죽음’을 애도하러 간 것이란 사실이다.

두 어린 죽음 모두 딸아이의 유치원 친구들이었다. 유치원엔 각 연령별로 두 반씩 모두 여섯 반이 있는데 우연찮게도 두 아이 모두 딸아이네 반 친구들이었다. 그 엄마들은 PTA(학부모회의)의 임원을 맡고 있었고, 두 사람은 회의 때마다 내 양옆에 앉아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곤 했던 이들이었다. 이런 기막힌 우연들이 조합되어 한동안 나는 공포와 우울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지난 연말을 한국에서 보내고 예정을 훨씬 앞당겨 새해 초이튿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런 까닭에 일본에 있는 지인들 중엔 내가 돌아 온 사실을 아는 이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이튿날 유치원의 PTA에서 함께 임원으로 일하고 있던 나이토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명랑하고 반가움에 가득찬 목소리와 달리 나이토상은 아주 주저하는 빛이 역력한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알리려는 듯했다.

“저, … 후까자와상네 히로끼군이….”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수술을 했다는데 결과가 좋지않아서 그만….”

나이토상은 ‘쯔야(通夜)’니 ‘고별식(告別式)’이니 하며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데 내가 일본의 장례절차와 예절에 대해 알리가 없었다. 그이는 다른 자세한 것은 유치원에 알아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부리나케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를 맡아보는 선생님이 ‘언제 돌아왔느냐, 어떻게 알았느냐’며 오히려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유치원 입학 전에 머리의 종양수술을 했었는데 결과가 좋아서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 모두 안심하고 있었다한다. 그러다 연말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서 입원하고 수술을 했는데 결국 깨어나질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애의 옆자리에 앉았던 아이였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딸아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정말 난감했다. 옆에서 얘기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 히로끼군이 왜? 어디 아프대?”라며 질문을 그치지않는다. 되도록 내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사실을 알렸다. 딸앤 의외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친구들과의 이별’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족과 친족,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시신을 지킨다는 '쯔야(通夜)’에는 가지 않기로하고 아이와 함께 다음날의 고별식에 갔다. 오늘 가는 장소가 어떤 곳이고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그렇게 얘기를 나눴건만, 아이는 고별식장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니 머릿 속에 입력시킨 것들이 모두 지워진 모양이었다. 천진한 아이들은 그저 밝기만 했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검은 색 정장이나 검은 색 기모노를 입는데, 우리네 보다는 좀 더 엄격하게 검은 색 복장 착용을 지키는 것 같았다. 짙은 회색이나 남색 등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입어도 예절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함)

유족들과 친척들만의 장례행사가 끝난 후 일반 조문객들의 고별식 (告別式)이 시작되었다. 고별식은 결혼식처럼 시간이 정해져있다. 3일장 중 아무때나 가서 문상을 할 수 있는 한국과는 좀 다른 점인 것 같았다. 낮 1시부터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는데 장의회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분향은 빠르고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식장 입구에 들어서면 조의금을 받는 테이블이 있고, 이곳에 조의금에 해당하는 오코뎅(お香典)을 내면 작은 티켓을 준다. 이것은 분향이 끝난 후 유족들이 준비한 답례품과 교환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녹차 2봉지 정도가 포장된 꾸러미를 받는다. 그 건너편엔 겨울의 무거운 코트를 맡아주는 코너가 있었다.

고별식장 안으로 들어서니 전면엔 꽃으로 장식된 영정이 놓여있었고 제단 위에 단지가 놓여있었던 것 같다. 지방에 따라 고별식을 시작하기 전에 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곳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식장의 앞자리에 스님이 앉아서 경을 읽고 있었고, 그 왼쪽 편에 유족들이 앉아서 왼쪽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조문객을 맞이했다.

유족들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서너명이 일렬로 서서 분향한 후 묵도했다. 분향대 위엔 히로끼군이 멋진 포즈를 하고 찍은 작은 사진과 평소에 좋아하던 장난감이 놓여있었다. 그것들과 죽은 아이의 엄마를 보는 순간 울컥 솟구치는 것을 참지 못하겠기에 진행에 방해가 되지않도록 그곳을 빠르게 빠져 나왔다. 출구 앞에는 소금 단지가 놓여있거나 낱개 포장된 소금이 놓여있다. 옷과 소지품 등에 뿌려서 좋지않은 기운을 떨어내는 의미라고 한다.

세상을 다 사시고 돌아가시는 어른들을 문상할 때와 달리 마음이 너무 착잡하였다. ‘겨우 다섯 해를 살고 떠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슬프고도 슬펐다. 자꾸만 그 애가 생각나고 그 애 엄마의 슬픔이 전이되어 와 힘들었다. 딸아이도 하늘나라에 간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 얘기를 자주 꺼냈다. 한달 전의 생활발표회 때 찍은 비디오를 볼 때마다 무대 위의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워했다.

그렇게 2주 가량을 보내고 1월 중순 경에 PTA의 임원회의가 있어 유치원에 갔다. 처음부터 좀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얼마 전에 죽은 아이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항상 내가 앉던 자리에 앉았다. 왼쪽에 앉던 후까자와상의 모습을 이젠 볼 수 없겠구나 싶어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오른쪽에 앉곤 하던 나이토상도 결석인 모양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례적으로 원장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아주 침통한 얼굴로 보고하실 일이 있으시단다. 나이토상에 관한 이야기인가본데 그날따라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씀을 하셔서 드문드문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벌써 몇몇 엄마들은 눈물을 찍어내고 흐느끼는 이까지 있었다. ‘무슨 일인가? 또 사고인가?’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서야 전모가 파악되었다. 전날 아침 나이토상 일가가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않았지만 아버지가 일가를 먼저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벌어지다니 충격이었다. 그 집엔 태어난 지 몇개월 되지않은 아기가 있었고, 5살의 아이와 부부가 살았다.

맥이 탁 풀렸다. 나이토상이라면 히로끼군의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던 이였다. 히로끼군의 고별식에 아기를 업고 참석해서 함께 슬픔을 나눴던 이였다. 무슨 사정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 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왜? 부모라고 하여 자식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원장 선생님은 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이번 고별식엔 선생님들과 PTA임원들 정도가 참가하는 것으로 하고, 아이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자세히 설명할만한 일이 못되었다. 우리 아이에게는 케이스께군도 히로끼군이 있는 하늘나라에 갔다고만 얘기했다. 아이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지만 더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고별식은 지난 번과 거의 똑같았다. 단지 커다란 4개의 영정이 걸려 있는 게 달랐고 상주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것이 달랐다. 엄마들끼리는 ‘더이상 이 상복을 입을 일 없게 당장 세탁해서 집어 넣자’고 입을 모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기분이 몹시 우울하다고 했다. 70세를 훨씬 넘기신 원장 선생님은 두 번의 장례식 후 돌연 자리에서 물러나셨다. 우리는 모두 안타까워 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으신 듯 했다.

나는 장례식 후 한동안 후유증을 앓았다. 히로끼군 때와는 다른 공포와 슬픔이 몰려들었다. 기막힌 ‘우연의 조합’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이의 쌍커풀 진 큰 눈과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고 밤에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무서웠다. 뭔지 모르지만 내 탓도 있는 것만 같았다. 여고괴담과 같이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공포물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후유증이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함께 수다를 떨어준 좋은 친구와 바삐 돌아가는 일상 덕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땐 글’을 쓰면 정리가 되고, ‘마음이 복잡할 땐 수다’를 떨고나면 정리가 잘 된다. 그리고 ‘망각’이야말로 신이 내리신 은총이란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차츰 마음을 어지럽히던 망령된 생각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딸아이의 말처럼 히로끼군도 나이토상 일가도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빌어주는 게 마땅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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