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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소매물도의 등대. 내게 등대지기의 꿈을 심어주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소매물도의 등대. 내게 등대지기의 꿈을 심어주었다. ⓒ 정철용
홀로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살다보면 어쩌다가 한 번쯤 삶은 닫혀 있는 문을 활짝 열어 그 영원의 안뜰을 내게 보여주리라 믿었다. 인적 드문 섬에서 등대지기로 살다보면 삶의 내밀한 정원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그 눈부신 색채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한 번쯤은 내게도 찾아오리라 믿었다.

그것은 점점 쓸쓸해지는 삶에 조금씩 지쳐가던 한 사내의 꿈이었다. 그것은 비루한 일상의 쳇바퀴에 조금씩 염증을 느끼고 있던 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남해안의 작은 섬 소매물도에서 만난 등대는 쓸쓸할 때 그저 노래로만 흥얼거리던 등대지기에 대한 꿈을 꾸게 하였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꿈은 그저 내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꿈일 뿐이었다. 보통사람들처럼 나도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예정된 삶의 순서를 피하지 못했다. 등대지기의 꿈은 바쁘고 가파른 일상의 삶 밑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등대 쪽으로 향하는 마음은 삶에 지치고 쓸쓸해지면 이따금씩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가 세워져 있는 거문도로, 우리나라 최남단의 등대가 있는 마라도로 여행을 다니면서 등대 쪽으로 향하는 내 마음을 다스렸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도의 등대. 가파른 삼십대, 내 마음은 자주 등대 쪽으로 향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도의 등대. 가파른 삼십대, 내 마음은 자주 등대 쪽으로 향했다. ⓒ 정철용
2. 등대 쪽으로 아니 등대가 비추는 어둠 쪽으로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시인 이응준도 나와 같았나 보다. 그는 등대 쪽으로 향하는 마음을 청춘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 청춘이기 때문에 등대 쪽으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갈 길은 멀어 보이는데, 보이는 것은 구차하고 비루한 일상의 어둠뿐이니 어찌 청춘이 등대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그는 등대 쪽으로 향하는 청춘에게 말한다.
“등대 쪽으로는/ 외롭다는 말 하는 거 아니라고”, “자꾸 힘들다는 말 입에 담지 말라고”.

그렇다. 등대는 절벽 아래 엄청난 기세로 몰려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를 견디어내고 있는 갯바위처럼 자신에게 닥치는 거대한 외로움을 말없이 감내하고 있는 존재이다. 등대의 빛을 밝히는 것은 어쩌면 그 외로움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등대 앞에서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시인은 삶은 “다만 밤바다에 배 가듯/ 어둠에 몸을 띄워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거”라고 등대 쪽으로 향하는 청춘에게 말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만드는 것은 그 길을 가는 나의 몸이지 그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아닌 것이다.

국내 최남단에 자리한 마라도의 등대. 등대의 빛을 밝히는 것은 외로움의 힘이 아닐까.
국내 최남단에 자리한 마라도의 등대. 등대의 빛을 밝히는 것은 외로움의 힘이 아닐까. ⓒ 정철용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선은 빛을 찾아” 등대 쪽으로 향하는 것이 “삶이 애써 죽음을 향해 가듯” 움직이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손쉽게 빛을 찾아 그저 등대 쪽으로 향하게 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기 쉽다는 의미일 터이다. 결국 우리가 향해야 될 곳은 빛이 나오는 등대 쪽이 아니라, 그 등대의 빛이 비추고 있는 저 어둠 속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등대지기를 꿈꾸던 이십대 중반의 사내가 역설적인 이 삶의 진실을 깨닫는 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 나는 가족들을 이끌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내 나이 서른 여덟 살이던 2001년 4월의 일이었다.

3. 등대는 내 마음속에 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은 처음에는 마치 어두운 밤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조그마한 지도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표지판에 의지해서 운전하는 여행자의 마음처럼 조마조마한 것이었다. 처음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이곳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가족들이 그립고 두고 온 조국 땅이 조금씩 그리웠다. 그리고 남해안의 작은 섬들을 지키는 등대들이 그리웠다.

지난 4월 여행길에서 뉴질랜드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케이프 레잉아(Cape Reinga)의 등대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난 것은 그래서였을까. 태즈만해(Tasman Sea)와 남태평양이 만나는 광대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 바라다보고 있는 그 등대 앞에서 나는 가족들 모르게 눈물을 닦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최북단에 자리한 케이프 레잉아의 등대. 내 마음 속의 등대가 여기서 점화되었다.
뉴질랜드의 최북단에 자리한 케이프 레잉아의 등대. 내 마음 속의 등대가 여기서 점화되었다. ⓒ 정철용
이 바다 건너 9000km 떨어진 곳에서 소매물도와 거문도와 마라도를 지키는 등대들이 밤마다 보내오는 빛이 어쩌면 뉴질랜드의 최북단에 자리한 이 등대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으로 향하는 내 마음을 이 등대의 빛에 담아 보내면 내 그리움도 소매물도와 거문도와 마라도의 등대들에게 닿을 것인가. 그들은 나의 그리움을 알아볼 것인가.

놀라워라, 그들은 알아보았다! 케이프 레잉아의 등대를 만나고 온 이후 그리움으로만 떠오르던 내 마음 속의 등대는 다시 불을 밝혔다. 뉴질랜드에서 다시 만난 등대는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꺼진 채로 남아 있던 청춘의 등대에 다시 불을 점화시켰다. 등대는 내 마음 속에 있었고 이제 나는 비로소 등대지기가 된 것이다!

스물 다섯 살의 청춘이 꿈꾸었던 등대지기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이미 등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니 어둠 속에서 길을 묻는 청춘이여, 등대 쪽으로 향하는 청춘이여, 부디 잊지 말기를. 그대 마음속에는 이미 등대가 있고 그 등대는 그대의 외로움과 쓸쓸함과 그리움으로 점화된다는 사실을. 그 등대는 그대가 어두운 밤바다에 배를 띄울 때 비로소 그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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