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산고 끝에 신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보내는 개발부서는 다 키운 딸 시집 보내는 심정일 것이다. 개발에 쏟아 부은 수고와 번민의 시간이 제품에 투사되어 의인화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스럽고 걱정스럽지 않으랴?

제조업체만 자사의 제품을 의인화 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된 제품을 구입해 사용하는 소비자 역시 정을 붙이고 애지중지한다. 자동차를 '애마'라고 부른다든지 하루의 절반을 소비하는 PC에 애칭을 붙여주고 쓰다듬곤 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사람이란 물건에 감정을 투사하고 개성을 지닌 생명체로 여기는 본능적 습성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폭스바겐 <뉴 비틀>
ⓒ 폭스바겐
물건을 생명체에 비유할 수 있다면 태어나고 자라나며 성숙하고 나이들어 결국 시장에서 퇴출되는 순환주기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품의 디자인 역시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환주기에 맞추어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람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선 독특한 용모가 있고 말씨가 있으며 즐겨 입는 옷 차림새와 특이한 습관 등이 종합되어 한 사람의 개성을 만들어 낸다.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형태와 색상, 곡선의 느낌, 손끝에서 느껴지는 질감, 자주 고장이 나는 부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독특한 개성과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심지어 제품의 소음과 특이한 소리 역시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람한 배기 음으로 유명한 할리 데이비슨의 모터사이클을 생각해 보자. 할리 데이비슨은 자사의 모터사이클에서 나는 배기 음을 상표등록까지 하려 했지만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또 인텔의 "딩동댕동" 하는 펜티엄 칩의 사운드 로고는 어떠한가?

유념할 것은 한 제품의 개성이란 어느 날 느닷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단 고객과의 상호교감을 통해 형성된 정체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뒤늦게 바꾸려 해도 하루 아침에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품의 기획과 설계, 출시와 유통 그리고 퇴출에 이르기까지 마치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와 같은 치밀한 제품의 정체성 관리가 필요한 법이다.

시류에 따라 이런 유행 저런 유행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중구난방의 디자인을 남발해 놓고 회사 로고만 덜렁 붙여 놓으면 소비자들이 자사의 제품을 알아주리라 여기는 것처럼 안이한 발상도 없다. 제품의 정체성이란 로고 하나 달아준다고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외쳐도 쉽게 각인되기 어려운 법이다. 갑자기 이름표 바꾸어 단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제조업체 태반이 적어도 디자인에 관해서는 이러한 초보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현대자동차는 뉴그랜저의 디자인 변경을 두고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수출용과 달리 내수용 모델의 브레이크 램프를 L자형으로 바꾸어 보았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결국 1년 만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 와중에 신모델이라고 차를 구입한 소비자들만 차의 가치가 떨어지는 불이익을 당하고 말았다.

국내 자동차 회사는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에서만 오랜 세월 장사를 해 온 버릇이 있어서인지 차의 정체성 관리 측면에서 볼 때 아직도 후진적인 모습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대표적인 실수는 신차를 출시할 때마다 새 이름을 붙이는 관행이다. 새 차가 나왔으니 새 이름에 새 기분으로 출발하면 마음은 상쾌할 지 모르겠지만 마케팅 전략에서 볼 때는 그다지 현명한 결정은 아니다.

▲ 포드 <썬더버드>
ⓒ 포드자동차
미국 시장에서 신차를 출시할 경우 새 이름을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데 드는 비용만 무려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구미의 유서 깊은 자동차 회사들이 신차를 출시해도 함부로 자동차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저 연식만 추가해 광고를 하는 것은 그들이 자동차 역시 생명체처럼 태어나고 자라나며 결국 사라져가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이런 방법을 통해 몇 년 마다 한번 씩 생짜로 이름을 알리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폭스바겐은 태어난 지 반세기도 더 된 <비틀> 자동차의 디자인을 매끈하게 바꾼 뒤 <뉴 비틀>이란 이름만 붙인 리메이크 모델을 만들어 다시 팔기도 했다. 이미 수 억의 고객 속에 각인된 비틀이란 자동차의 정체성을 손쉽게 되살려 판매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포드 자동차 역시 왕년의 명차들을 그대로 되살린 <썬더버드> 같은 리메이크 모델로 요새 재미를 보고 있다.

회사 이름 하나 세계시장에 제대로 알리는데도 수 십년의 시간에 막대한 마케팅 경비가 투여 되는데 하물며 신제품마다 새 이름을 달아주는 한국 자동차 회사의 배포만큼은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디자인 회사 이노 디자인은 CIPD(Corporate Identity through Product Design)라는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회사의 정체성이란 단순히 기업 이미지 광고나 로고만 알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디자인에도 일관성 있게 반영되어 형태만 일별해도 그 회사의 정체성과 지향하는 이념이 고객들에게 순식간에 전이될 수 있어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이다. 한 마디로 온 몸으로 외치는 디자인이요 회사의 정체성이 반영되는 제품 디자인이다.

국내 모 전자회사는 디자인에 무지한 회사 고위층의 개입으로 실무진에서 제안한 훌륭한 디자인이 결국 사장되고 엉뚱한 모습의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어 실패를 거듭하자 디자인과 관련된 의사결정에는 실무진 외에 일체 윗선의 개입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극약처방을 내린 그 회사의 생각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와 제품 디자인이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쳐 성장하고 소멸하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면 오히려 회사 최고위층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는 핵심 의사결정 사항으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유능한 디자인 전문가를 이사로 초청해 그에게 전권을 부여하며 디자인에 관한 한 사내 어떤 비전문가의 입김에도 영향 받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디자인을 그저 물건 예쁘장하게 치장하는 작업으로만 여기는 회사들이 아직도 많다. 고객은 제품의 디자인을 통해서 그 회사를 바라보고 호감이나 반감을 형성하게 된다. 한 번 만들어진 이미지와 정체성은 뒤늦게 많은 돈을 들여 광고를 쏟아 붇는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기술의 급속한 평준화로 제품의 품질과 성능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를 이루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우리의 기업들이 '디자인 맹(盲)'에서 깨어나야 할 적기이다.

부디 심사숙고해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기 바란다. 지금 내린 선택은 두고 두고 귀사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디자인을 바꾸려 할 때는 초기 개발비의 수 십 배에 달하는 마케팅 경비가 투입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