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가 이루어낼 평화의 낙원은 아직 볼 수 없지만
우리 아무리 용감해도 전쟁의 걸신들 또 태어나지만
공연한 의기소침과 자포자기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희망은 자꾸 자라고 절망은 꼬리 내리며 사라질거야

우리들 마음 이미 옳고 그름을 올바로 볼 수 있으니
선두에 나선 이들 곁에서 우리도 어른스레 싸울 수 있고
인류가 무리지어 일어서고 생명의 외침이 시작되니
빛이 없어진 곳에 우리 끊임없는 빛을 가져와야지

- 페트라 켈리의 '우리 세대는 달라' 중에서


페트라 켈리는 녹색운동과 녹색 정치의 씨앗을 전세계에 뿌린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명석한 두뇌와 대단한 열정, 매력적인 화술에 예술적 감성까지 갖춘 이 운동가와 그가 일으키는 녹색 바람을 주목했다. 녹색운동의 잔다르크라고까지 불렸던 그는 1992년 10월 26일 갑작스럽게 시체로 발견된다. 그와 그의 애인이었던 나토의 총사령관 게르트 바스티안이 그의 집에서 총을 맞은 채 쓰러져있었고 경찰은 바스티안이 페트라를 죽이고 따라서 자살을 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새라 파킨의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김재희 옮김·양문 2001)는 페트라 켈리의 의문사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페트라의 이야기

독일 나치의 온상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페트라는 "나치가 하는 모든 짓거리에 결사 반대"하는 씩씩한 할머니 밑에서 모범적인 우등생으로 자라났다(그의 어머니 마리아네는 페트라가 어렸을 때는 일을 해야했고 페트라가 컸을 때는 양아버지 존 켈리 대령과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할머니만큼 패트라와 친밀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추진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사람들 만나기를 즐겨하던 페트라가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1963년 버밍햄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가두 행진을 계기로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페트라는 정치 현실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면서 '빈민 지역 흑인 어린이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 클럽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한다.

당시 학생들이 히피족의 자유방임주의 아니면 혁명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던 반면 페트라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모든 것에 대적하는 혁명"을 막연히 꿈꾸었을 뿐이었다.

외국 대사관이 늘어선 유명한 동네, 전 세계 외교관이 모여사는 매사추세츠와 네브라스카 애버뉴에 자리잡은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업무학을 공부하면서 페트라는 "자기 집 마당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공감하는 분별"을 가지게 된다.

1985년은 그에게 격동의 시기였다. 그가 존경한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이 연이어 일어났고, 암에 걸린 동생 그레이스와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 위해 찾아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페트라는 비폭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슴 깊이 인식하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고, 순식간에 사라질 생명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없"이 수만명의 목숨을 빼앗는 결정을 내리는 정치가와 비폭력의 상징인 킹 목사의 죽음을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시민들, 가작 지독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며 묵묵히 저항해온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과 그 지도자들…. 페트라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을 예측하는 결정적 사건들이 되었다.

1970년 5월 동서유럽의 문제를 다룬 국제정치 분야의 논문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데 이어 아메리칸 대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우드로우 윌슨 장학생으로 선정되는 등 페트라는 그의 고민을 심화시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럽의 통합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간 암스테르담은 그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페트라가 어느 덧 "어른이 되는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와 문화의 도시 암스테르담이 페트라에게는 또 다른 촉진제가 되어준 탓이기도 했다.

온통 남성뿐인 유럽

샨테 와시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녀를 샨테 와시데(착한 마음의 여자)라 부릅니다. 그녀는 쓰러진 나무의 말을 듣고 또 말을 걸 수 있는 숲속의 외로운 소리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처럼… 이렇게 우리 마음에 불꽃을 지펴주시니 우리의 저항은 꾸준히 계속될 것입니다."
- 밀로 노랑머리, 사우스다코타의 오글라라라코타 인디언 대표
1971년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 총무부에 취직하면서 페트라는 "때로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겁이 더럭 날 만큼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지는" 유럽공동체에 발을 디디게 된다. 다음 해 경제 및 사회복지위원회(경사위)의 행정사무관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공동체의 중심에 뛰어든 페트라는 다양한 활동을 제안하고 실행한다.

우연히 랄프 네이더(소비자권리 운동가)의 시민모임에서 '방사선과 암의 관계'에 참석하면서 그의 활동영역은 반핵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뷜(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면한 바덴뷔르텐베르크의 마을)에서 열린 핵발전소 집회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호주 철도노조의 초청으로 히로시마 기념일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페트라는 반핵운동의 대명사로 떠오르게 된다.

1970년대 말이 되면서 페트라는 더 이상 직장과 정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특유의 민첩함과 꼼꼼함으로 둘 사이에 균형을 취하는 요령을 어느 새 깨우친 것이었다. 그 즈음 독일에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1978년 <타게스차이퉁>이 창간되었고 시민단체의 수는 어느 덧 1000여개에 달했다.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30만 명을 넘어섰다. 페트라 역시 그러한 열망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흥청망청 이미 소비사회로 변모한 독일의 문제를 인식하고 중요한 가치 기준을 스스로 구별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 물음의 답은 녹색운동이었다.

마침내 "하나는 의회와 지방정부에서 발길질을 해대고 다른 하나는 계속 운동에 주력하는 상당히 기묘한" 두 다리를 가진 정당이 탄생하였다. 페트라는 이 때의 기분을 '1976년 이후 내 꿈이 실현되었다'고 표현한다. 비록 유럽의회 선거전에서는 5퍼센트의 문턱을 넘지못해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당시 득표율 3.2퍼센트)페트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반핵운동의 수호자이며 프랑스 녹색당 대표인 쏠랑쥬 페르네스와 함께 공정치못한 유럽의회 선거제의 맹점을 폭로하는 시위대를 조직하고 유럽녹색당을 결성한다.

그는 녹색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면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사춘기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강인한 여성을 동경해온 페트라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장 존경했다.

역사책이나 성경책 혹은 다른 경전 역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용감한 여성들의 특별한 점을 깨달았으니, 이후 나는 칼 맑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 따위 남자들에게 더 이상 존경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노동계급에 대해, 자본에 대해, 독선적인 이론을 세우고 철학을 떠드는 이 고매하신 어른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마초 남자로… 혼자서는 요리도 청소도 바느질도, 심지어는 스스로를 돌볼 힘도 없는 딱한 존재들!

페트라 켈리는 누구인가?

유럽 녹색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현재 독일 녹색당 창당을 이끈 세계 평화운동의 산 증인이다. 시민이 주도하는 풀뿌리 운동을 통해 단련된 활동가로서, 독일연방의회 의워으로 활약하면서 페트라는 환경파괴의 재앙과 사회적 불의, 군수산업으로 주도되는 인간 영혼의 파괴 현장에 생명의 불을 지피며 수억의 영혼을 깨어나게 한 녹색운동의 신화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소장한 책들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프란치스카 폰 레벤틀로프 등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그 중 딱 두권이 남성작가의 책이었는데 두권 모두 선물받은 것이었다).

유럽공동체에 일하면서는 유럽공동체의 남성 우월적 분위기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 또 하나의 담을 쌓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정치 현장으로 진출해 그들과 함께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여성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남성이 탄생해야 한다!

유럽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작업이 여성 권익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페트라는 1975년 케냐에서 열릴 '세계 여성의 해' 준비를 맡아 꼼꼼히 자료 준비를 했다. 또한 페트라는 로마협약(1957년에 발효된 유럽경제공동체의 창설을 공표한 문건)에도 여자와 남자의 임금 차별 금지가 명시되어 있지만 그런 권한이 교묘히 축소되고 있음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시스템에 깔려있는 폭력과 억압의 요소를 발견한다.

여성은 아무리 훌륭한 자리에 오르거나 성공을 해도, 그 어깨 뒤에는 시커먼 그림자의 남자가 있어 사사건건 무언가를 지시받는 꼴이다.

녹색여신 페트라 켈리

페트라 켈리의 유명세와 함께 지지도를 높여가던 녹색당은 1983년 드디어 녹색당이 5.5퍼센트의 지지로 연방의회에 진출하게 된다. 페트라는 의원의 지위를 십분 발휘해 반핵운동은 물론 생태주의, 비폭력주의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동서독 통일을 위한 비폭력 혁명도 그의 활동 중 하나였다.

그는 동독 위원장 에릭 호네커를 만나 구속된 평화운동가들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 평화조약안을 받아내기도 하고 동베를린으로 온갖 자료와 책, 복사기와 인쇄 기계등을 들여가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다양한 일에 참여했는지는 그가 준비한 일문일답(의회에서 다른 의원들 앞에서 답변을 요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의 주제를 준비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의 주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여덟 개의 일문일답 중 암에 걸린 어린이 관련 둘, 핵무기 관련 둘, 화학무기 관련 하나, 여성인권 관련 하나, 우라늄 관련 하나, 자동차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 관련 문제가 하나였다.

또한 페트라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는데 특히 티베트 문제, 호주와 북미에서 어려움을 겪는 원주민들 문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들의 문제, 아일랜드 사안 등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들은 페트라 사후에도 계속 진행이 되어 전담팀이 꾸려지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는 "자기 열정을 감당못해 몸을 던지는" 페트라를 주목하고 또 그에게 열광했다. 페트라는 자신이 하고싶은 일은 무엇이든 해내고야 마는 끈기와 열정으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실천했다.

불타는 열정과 거침없는 상상력을 쏟아내던 카이저슈툴 주민들의 뜨거웠던 논쟁. 그때의 일은 내 삶을 통틀어 가장 가슴벅찬 기억이 되어 언제나 새로운 정치의 지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끈기와 열정이 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야기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의 폭은 갈수록 협소해졌다. 녹색당은 근본파와 현실파로 분열되었고 그 둘을 화해시키려 애쓰던 그룹마저 중도파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졌다. 현실파는 지속적으로 다른 당과의 연정을 주장했고 갈수록 현실파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사분오열된 녹색당의 회의는 내부 사안을 이야기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가 녹색당 내에서 결정적으로 고립된 것은 페트라가 4년 임기를 채우겠다고 고집하면서부터였다(당시 녹색당은 4년의 임기를 2년으로 나누어 두 의원이 맡도록 했다. 페트라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스스로 어김으로써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사안에 세계가 집중하는 반면 정작 녹색당 내부에서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가 돕고자 했던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도 "방랑하는 연예인인지 진정한 지도자인지 알게 뭐냐"는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특정한 종교 지도자를 후원하는 것은 좋지않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이에 페트라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우리가 언제 아르헨티나 마요 광장에서 시위하는 어머니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어느 종교를 가졌는지 따져보고 도왔습니까? 니카라과를 도울 때 그들이 미사참례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습니까?

녹색운동의 잔다르크라는 칭호까지 붙었지만 녹색당에서 페트라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1991년 연방의회에서마저 탈락되면서 생활고까지 겪어야 했던 페트라는 예전과 달리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하는 일을 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에 대한 그의 열정마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이에른 지구당에서 제안을 받기도 하고 유럽의회 선거 후보 제의를 수락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시기 페트라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녹색여신 페트라, 그가 남긴 것

그리고 1992년 10월 1일 그는 그의 연인 바스티안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게된다. 의문투성이의 사건이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는 이유로 사건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저자는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고 헌법에 명시된 나라, 순결을 잃은 여자를 돌로 쳐 죽여도 좋은 뉴델리나 테헤란이 아니라 서유럽의 중심이자 독일의 수도인 본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그가 대안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라 해도, 그녀를 죽인 장본인은 서로 연인 관계인 함께 살던 남자가 저지른 짓이니 누구도 그에 대해 뭐라말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한다.

페트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녹색운동의 동료이기도 한 새라는 페트라의 죽음은 "지구촌의 정치 전반에 커다란 유산과 숙제를 남겨놓"았다고 평가한다.

그가 말한 비폭력은 단순히 "단순히 시위에 나가 경찰한테 두들겨 맞더라도 되받아 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긍정하는 적극적인 사랑을 의미했다. 그가 추구한 녹색정치는 원칙을 어기는 타협을 하지 않고, 정의 대신 불의가 세상을 지배할 때 저항은 의무가 되는 것이었고, 그가 주장한 녹색운동은 지구와 함께 살기 위해 꽃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실천이었다. 그가 생각한 평화란 우리의 어머니별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에 대한 공경의식을 나눠갖는 것이었다.

자신을 '직관적이고 집요하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했던 사람, 저자가 인도에 가서 택시를 탔을 때 녹색정치를 한다고 했더니 대뜸 "그럼 당신이 페트라 켈리인가요?"하고 물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 그의 웃음만큼이나 푸른 씨앗을 세계 곳곳에 뿌린 사람이 바로 페트라 켈리였다.

새라 파킨의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는 이와 같은 페트라 켈리의 삶을 꼼꼼히 조명해낸다. 열정적인 녹색여신 페트라의 꿈과 희망, 지칠 줄 모르는 용기와 추진력이 동료의 애정어린 눈과 손으로 새롭게 쓰여졌다. 페트라만큼이나 끈질긴 의지를 가지고 페트라의 삶을 추적한 새라의 노고는 글 속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페트라의 푸른 열정을 담은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는 페트라가 없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녹색 씨앗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새라 파킨 지음, 김재희 옮김, 양문(200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