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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막연히, 베트남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내 마음 속의 지도 최단거리에 놓여 있던 곳. 신문지상에서 베트남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나 베트남 사진을 볼 때마다 베트남의 풍경이 상상 속에 펼쳐지곤 했다. 바쁜 일상이 조금 한가해질 무렵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 호치민으로 가는 관문 - Tan Son Nhat 공항
ⓒ 양유창
베트남 항공의 에어버스 비행기가 나를 호치민 탄 손 낫(Tan Son Nhat) 공항으로 데려다주었다.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어 다소 위압적으로 보이는 공무원들이 사회주의를 실감나게 한다. 일주일 전에 서울에서 미리 받아둔 베트남 비자를 보여주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야자수가 여기저기 뻗쳐 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것처럼 바닥이 흥건하지만 오히려 무덥고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나는 버스를 타고 호치민 시내로 들어갔다.

1945년 9월 2일 베트남 공산당의 리더 호치민은 오랜 식민지 기간을 청산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이후 베트남의 경제문화 중심지였던 사이공은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선물받았다. 서양인들에게 '미스 사이공'으로 기억되는 도시, 지금 베트남에서 가장 자본주의화된 도시인 호치민에는 여러 외국계 기업들이 몰려 있고 7백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거리를 온통 뒤덮은 오토바이의 끝없는 물결. 베트남의 첫 모습은 이렇듯 역동적이다. 1986년 시작된 베트남 경제부흥 정책인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은 자본주의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무섭게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모습은 발전하는 베트남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비친다. 소니, 삼성, 필립스 등 다국적 기업의 간판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차량에는 ‘대우’, ‘O번 버스노선도’ 같은 한국어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류열풍 이후 한국은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70∼80년대 한국에서 영어로 쓰인 물건이 인기였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선진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이 커져가고 있다.

▲ 기념엽서와 옛날 화폐를 파는 아이. 안됐다는 생각도 잠시 뿐. 이들은 포기할 때까지 쫓아다니고 한 번 물건을 사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서도 아이들이 나타난다.
ⓒ 양유창
그러나 자본주의의 화려함 뒤편에 또아리를 튼 어두운 면도 이곳에서 함께 발견된다. 경제 발전 속도에 반비례하여 베트남 한 구석은 곪아가고 있다. 관광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말을 붙이는 것은 꼬마 아이들이다. 이들은 한국말로 “1달러 1달러”를 외치면서 관광객에게 엽서나 기념동전 따위를 사달라고 간청한다. "안사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못들은 척 졸졸 쫓아다닌다. 30여분쯤 실랑이를 벌이다보면 아이들의 꼬질꼬질한 얼굴이 안되어 보여서 결국 손을 들고 만다.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사실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살 수 있는 편이 아닌데도 모두 오토바이를 탄다. 도시민의 평균 월급은 한국 돈으로 10만원 정도인데 오토바이의 가격은 대략 200∼300만원 선. 몇십만원짜리 중국 또는 한국산 오토바이도 있지만 대부분 일본이나 이탈리아제 오토바이를 선호한다.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 비싼 오토바이를 살 수 있을까?

▲ 비가 내리는 호치민에 자전거, 오토바이, 리어커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 양유창
의문은 술집에서 만난 한 베트남인에 의해 곧 풀렸다. 베트남에는 ‘동’이라는 고유화폐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달러가 자국화폐처럼 곳곳에서 통용된다. 이렇게 국내로 들어온 달러는 공식적인 수입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에는 암시장이 더 발달해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도시와 농촌간의 엄청난 빈부격차 등 베트남은 경제 성장과 함께 성장에서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공원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오토바이의 물결은 끊일 줄 몰라 길을 건너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공원 한켠에 오토바이 위에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는 두 남녀를 보니 '베트남=닫힌 사회'라는 선입견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밤거리를 몇 분간 구경하다가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한 술집으로 향했다.

▲ 각종 상점이 있는 골목. 저마다 오토바이를 정차해놓은 풍경이 인상적이다.
ⓒ 양유창
싱가포르산 타이거 맥주는 베트남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맥주다. 타이거 맥주를 들고 다른 관광객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온 두 여성은 캄보디아에서 막 국경을 넘어온 참이었다. 그들은 일명 ‘어드벤처’ 투어라고 불리는 코스를 택했는데 작은 버스를 타고 수십시간 동안 국경을 건너는 것이다. 도로가 대부분 비포장이라서 그 여정이 정말 고역이었다고 한참 푸념을 늘어놓는다.

유럽에서 온 한 남자는 이곳에서 산 CD 자랑을 했다. 유명 아티스트의 복제 CD를 장당 8000동 정도에 판매하는데 가격이 너무 싸서 잔뜩 샀다고 한다. 미화 1달러가 대략 15500동 정도이니 CD 1장에 700원도 안되는 가격인 셈이다. 가벼운 맥주와 함께 대화가 오고가며 베트남에서의 첫 날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 전경
ⓒ 양유창
과거 중국, 태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침략을 받아온 역사는 베트남에 다양한 문화양식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식 건축물, 중국식 사원, 미국식 오락문화 등이 그 예이다. 300년 역사를 가진 호치민은 매우 베트남적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살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식민지로서의 잔재도 여기저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동양의 진주'로 불리웠던 이곳에 프랑스인들은 노트르담 성당을 지어 사이공을 소유하려 했다. 호치민의 노트르담 성당은 1877년에서 1883년 사이에 네오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지어졌는데, 현재 베트남에는 20%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호치민은 계속해서 새로운 기업 건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삼성, LG, 대우, 현대-기아 등 한국 기업들의 진출도 두드러진다. 특히 삼성은 현지법인 'SAVINA'를 설립해 큰 호응을 얻고 있고, 태광실업은 태광-비나(Taekwang-Vina)를 세워 베트남의 저렴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은 베트남 홍보 한국 명예영사로 위촉되기도 하였다.(아, 여기에서 Vina란 베트남을 부르는 애칭이다.)

▲ 사이공 강(River)에 걸려 있는 다국적 기업의 광고판들
ⓒ 양유창
여행 중에 잠깐 여행사에 들렀다. 여행과 관련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사무실 한 편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나에게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한국어로 호치민에 대해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몇 가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야오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베트남인으로 60년대에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뒤 베트남 TV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편집부위원장까지 지낸 뒤 은퇴하고 지금은 벤 탓 투어리스트(Ben That Tourist)라는 베트남 여행사에서 한국어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 다닐 당시 좋아했던 작가를 물었더니 이기영을 댄다.

▲ 북한과 남한을 모두 가봤다는 베트남인 야오이씨
ⓒ 양유창
그가 북한에서 7년을 살긴 했지만 북한을 떠나온 지 어언 몇 십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사실 그가 하는 한국어는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낯선 한국어를 하는 그 노인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멀게만 느껴졌던 김일성 종합대학이란 단어가 묘한 울림을 주었다. 노인은 남한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봤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트남의 변화에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베트남인이라고 보는 편이 나았다.

호치민 여행은 계속되었다. 몇몇 관광명소들을 가보았다. 하지만, 솔직히 어떤 관광지보다도 내 관심을 더 많이 잡아 끈 것은 도로 그 자체였다. 시내 도로에는 자동차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도로는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도로는 대부분 오토바이를 위해 기능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지나가려하면 클랙슨을 시도때도 없이 울려야 한다. 낮에 한차례 비가 왔지만 사람들은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우비를 입은 네 식구가 한 대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 지금 호치민의 속도는 오토바이의 궤적처럼 빠르다.
ⓒ 양유창
베트남에는 횡단보도나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오토바이는 달리고 길을 건널 사람은 그냥 건너면 된다. 오토바이가 워낙 많아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보행자 사고는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는 편이다. 베트남에는 아직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지 않다.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 몇 대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정도인데, 도로가 좁은 탓에 대부분 일방통행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일반적인 출퇴근 시간은 아침 7시에서 오후 4시까지이다.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일찍 일하고 일찍 퇴근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토바이가 쏟아져 나오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는 대형 버스의 도로진입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의 위험이 있기에 운행을 금지한다고 하니 과연 오토바이의 천국이라고 할 만하다.

나도 오토바이를 빌려 타보고 싶었지만 면허증이 없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해서 탈 수 없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베트남 사람들 역시 면허증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장소를 이동하기 위해 여행객은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다양한 브랜드의 택시가 있는데 차종은 주로 기아 프라이드가 많다. 택시요금은 시내에서 대부분 1만2천동(900원) 정도. 영화 <씨클로>를 통해 잘 알려진 씨클로는 택시가 보편화된 이후 단지 관광객들을 위해 돌아다닐 뿐이다.

▲ 호치민시를 달리는 세 운송수단 - 버스, 택시, 씨클로
ⓒ 양유창
지하의 개념이 아직 없는 베트남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건물이 드물고, 지하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기차는 시속 40~50km로 달린다. 이렇게 대중교통이 열악하다보니 시내가 아닌 시외로 이동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편이다. 호치민에서 버스를 타고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가려면 3박 5일 동안 가야한다. 중간에 나짱, 후에 등지에서 하룻밤씩 묶는다. 버스는 2명의 기사가 교대로 운전하는데 승객들은 돼지 등 가축을 버스 위에 싣고 버스 안에서는 자리를 펴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

호치민 사람들이 사는 건물은 좁고 낮은 아파트이다. 하지만, 이 가느다란 성냥갑 같는 건물은 안쪽으로 좀더 깊게 파여 있어 실내로 들어가면 훨씬 넓어보인다고 한다. 이는 열대지방인 지역 특성상 햇볕이 적게 드는 것을 선호하고 지반이 약해 집터가 기울거나 틀어지지 않도록 서로 의지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탓이며, 이와 같은 집의 형태는 프랑스 식민시절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한다. 또, 1992년 베트남 공산주의가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일정 땅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급적 좁은 면적에서 세로가 긴 건물을 지어야 했다.

베트남 하면 쉽게 떠오르는 아오자이(Ao dai)는 그러나 쉽게 보기 힘들었다. 학생 교복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고 대부분 관광지에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오자이를 맞추려면 무려 22군데의 신체치수를 재야 한다고 하는데, 가격은 보통 20만동(1만6천원) 정도이며 싸게는 8만동(7천원)에서 비싼 것은 100만동이 넘어가는 것까지 다양하다.

베트남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역동성’ 그 자체였다. 정신없이 움직이고 정신없이 변화하는 현실이 한국사회와 닮았다. 풍요롭지 않지만 저마다 새로움의 꿈을 꾸는 곳. 128KB의 속도를 낸다고 하는(실제로는 그 속도의 1/10도 안된다) 인터넷 카페를 드문드문 볼 수 있을 뿐이지만, 2010년에 100명당 1명꼴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인 베트남. 제때 오지도 않는 버스가 무척 불편하지만 선진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계획중인 베트남은 차츰차츰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한국인은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없던 건물이 들어서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이야기한다.

▲ 자본주의로 위치이동하고 있는 베트남 사회주의
ⓒ 양유창
이웃나라 중국이라는 대국에 치여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베트남은 변화하고 있다. 지난 봄 사스가 발병했을 때도 가장 먼저 대응한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중국에서 오는 관광수입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인의 입국을 막고 세계 최초로 사스청정지역으로 인정받은 발빠른 행정은 이전의 베트남이라면 보여주지 못했을 역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 재밌는 사실. 베트남에는 전국 방송 세 개(VTV1은 국정/시사, VTV2는 교육, VTV3은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와 60개 성마다 각각 한 개씩의 지역방송국이 있는데, 요즘 거의 모든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채널 돌릴 때마다 어느 시간대에서건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더빙을 한 성우가 전부 담당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즉, 한국어 원어를 작은 소리로 깔아놓고 한 여자 성우가 모든 배우의 대사를 같은 톤으로 그냥 읽어가는 식이다. 대사의 감정 전달은 전혀 안되고 그냥 내용만 알 수 있는 정도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베트남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런 식의 외화 방영을 해왔기 때문에 관례로 굳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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