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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 저녁 나절의 금강산.
8월 중순 저녁 나절의 금강산. ⓒ 권기봉
JSA 근처에서 밤을 지새울 때가 있었다. 순환 경비 차 JSA 인근에서 침낭 하나 펴놓고 별 보며 달 보며 잠을 이룰 때면 어디선가 들려오던 그 알 듯 모를 듯한 방송 소리. 하루 24시간 피곤에 절어 있던 때라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잊은 지 오래지만, 아마도 '서로'를 향한 방송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약 100일 후인 지난 13일(수), 한때 JSA 인근에서 사격훈련과 완전군장 구보를 하던 내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100일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북핵 사태와 대북송금 특별검사 등 수많은 악재로 인해 금강산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정말 북한에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특히 출발을 열흘 정도 앞둔 8월 4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갑작스러운 투신 자살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이 일시 중단된 이후 관광 재개에 대한 별다른 소식이 없어 무척이나 초조해 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13일부터 관광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육로 개통 근 반 년만에 756명의 남한 학생들이 육로를 통해 북한 금강산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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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만에 뛰어넘은 50년의 간극

정확히 4분. 남방한계선을 통과한 전세버스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방한계선에 도착하기까지 더도 덜도 않고 4분이 걸렸다. 남방한계선을 오후 2시 48분에 통과한 버스가 군사분계선을 지난 것은 그로부터 약 2분 뒤인 오후 2시 50분. 북방한계선까지 가는 데 다시 2분이 걸려 정확히 2시 52분에 북쪽 통문을 지날 수 있었다. 고작 4분만에 지난 50년간 그 누구도 가기 힘들었던 길을, 756명의 젊은 청년들이 통과한 것이다.

출국 수속을 위해 임시남북출입국관리사무소로 들어가고 있는 756명의 학생들.
출국 수속을 위해 임시남북출입국관리사무소로 들어가고 있는 756명의 학생들. ⓒ 권기봉
반 세기 동안 갈 수 없었던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데 불과 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데서 온 충격 못지 않은 긴장이 온몸으로 느껴진 것은 통문을 통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북방한계선을 넘자마자 멈춰선 23대의 버스에 각각 올라탄 두 명의 북한 군인. 인원 확인을 위한 것이기에 별다른 일은 없을 테지만, 채 30cm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처음 대면하는 북한 군인이기에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100여 일 전까지만 해도 '다른 쪽'이라고 생각하며 군사 훈련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마냥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긴장으로 심신은 경직되었다.

군사분계선은 가고 오작교는 놓여라

그러나 버스 안의 이런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창 밖은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군사적으로 긴장도가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몰라도 키 큰 나무들은 모조리 벌목된 상태였지만, 두둥실 하늘에 뜬 구름이나 산과 들판에 놓인 큼직큼직한 바위들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이나 북이나 매한가지였다.

8월 13일,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8.15km 길을 최초로 걸어서 이동하다.
8월 13일,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8.15km 길을 최초로 걸어서 이동하다. ⓒ 권기봉
버스에서 내린 북한 군인들이 짐칸까지 점검을 마친 후, 버스 행렬은 다시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길 가장자리에 촘촘히 박혀 있는 조약돌에서 십 몇 년 전 살던 월악산 기슭의 마을 앞길을 떠올렸다. 정겹기만 한 이 길은 7번 국도의 연장이란다.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달리는 7번 국도는 도로 주변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아 길 자체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감호를 지나자 구선봉, 일명 낙타봉이 오른쪽에 보이고, 이름 모를 돌산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서로 내민 손길이 아닐까 싶다.

자못 평화로운 풍경 못지 않게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면 남쪽 통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서로 뒤질세라 함께 달려온 동해선 철로일 것이다. 지금은 남북 연결이 끝나서인지 별다른 작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철로 한 편에 수북하게 쌓아놓은 침목과 현대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중장비는 남과 북 사이에 오작교를 잇기 위한 까마귀와 까치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강 다리를 지나면서부터는 군데군데 무표정하게 서 있는 초병들 너머로 민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는지 거개가 을씨년스러운 회색 빛이다. 회색 빛 기와와 회색 빛 벽, 또 회색 빛 담장. 군데군데 서 있는 '군민일치'와 '자폭정신', '풀 베기 전투장'이라고 쓰여진 입간판들은 이질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50년 동안 왕래 없이 살면서 우리가 '새마을 정신'과 '하면 된다'를 내세우는 동안 이들은 '자폭정신'과 '자력갱생'을 주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남이나 북이나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이고 전투였던 시절이 있었던 게다.

ⓒ 권기봉
그러나 북한이라고 해서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닌 것은 분명 아니다. 둑에 서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황소와 들판을 덮고 있는 옥수수와 콩, 깨를 보니 할머니가 김을 매고 소를 치는 우리네 농촌 풍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농구 하는 아이들이나 담장에 매달려 수십 대의 버스 행렬을 자못 신기한 듯 쳐다보는 꼬마들. 군사분계선 남쪽과 다른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북쪽 통문에서 장전항까지 이어지는 길 양 옆으로 광활하게 조성되어 있는 봉화리 옥수수밭은 '슈퍼 옥수수'로 잘 알려진 김순권 박사의 작품이라는 것이 안내를 맡은 조현숙씨의 설명이다. 금천강 다리를 건너 이 너른 옥수수밭이 다 끝나갈 무렵, 세조가 온천욕을 하고 피부병을 고쳤다는 온정리로 가는 길과 남에서 배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도착하는 장전항으로 가는 길로 나뉘는 삼거리가 나왔다. 일단은 입국 수속을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는 장전항으로 갈 참이다.

ⓒ 권기봉
삼거리에서 막 오른쪽 길로 들어설 무렵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 저 멀리 산 아래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금강산 청년역. 예전에 이화학당이나 배화학당 학생들이 금강산 여행을 오면 이용했다는 역사로, 지금은 마을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동해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 이용하게 될 역사일지도 모르니 더욱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8.15km를 걷다

'남북철도'든 '북남철도'든 빨리 개통만 되어라.
'남북철도'든 '북남철도'든 빨리 개통만 되어라. ⓒ 권기봉
하늘에서 보면 활 시위처럼 생겼다는 장전항. 그곳에서 입국 수속을 밟았다. 도로 위에서의 인원 점검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화장실에 가느라 자기 차례를 놓친 학생에게 미소와 함께 "이거 이거, 대학생이 자기 차례도 모릅네까?"라며 여유 있는 농담을 던지는 북한 군인은, '최전방'의 군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뒤로 하고 북측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출발했다. 이번 금강산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곳 장전항에서 숙소가 있는 온정리까지 약 8.15km를 걸어가는 것. 불과 이틀 뒤면 8·15 광복절이어서 더욱 감회가 남다른 '8.15km 걷기 행사'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것은 설렘이었다. 어차피 숙소에 가봐야 지정된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북녘의 길을 마음대로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됐던 나라 북한. 그곳에서 755명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잘 포장된 길 위를 걸었다. 버스에서 얌전히 앉아 바라보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신선한 공기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금강산 자락에 걸려 있는 구름이 모두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긴장으로 움츠려졌던 몸과 마음은 금강산 자락에 걸려 있는 금빛 노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후 6시 21분 '금강산 연유 공급소'라는 간판을 단 국내 정유업체의 주유소를 지나면서 마침내 최초의 장전항-온정리 구간 도보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최초'라는 것이 그다지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곳이 북녘 땅인데다가 아직 절망보다는 희망이라는 말에 익숙한 청년들이 그 첫 번째 주자라는 점에서 분명 놓치기 싫은 최초임에 틀림 없다.

8.15km의 길은, 그러나 철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8.15km의 길은, 그러나 철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 권기봉
그런데 북한 주민과의 직접 접촉을 막고 남쪽에서 온 관광객들의 이탈을 막기 위함인지 길 양 옆으로 사람 키보다 높은 철망이 장전항에서부터 온정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틈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북한 초병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금강산에 왔다고 해서 온전한 북한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군사분계선을 지난 이후 지금까지 북한 사람을 두 차례 가까이 대면할 수 있었는데 북방한계선을 넘자마자 버스에 올랐던 두 명의 굳은 얼굴을 한 군인들이 처음이었고, 장전항에서 입국 수속을 하면서 만난 일단의 군인들이 두 번째였다. 이제 한 차례가 더 남아 있는데, 금강산에 들어가면 보게 될 현지 환경보호원들이 그들이다. 이를 두고 금강산 관광은 여행자의 자유가 보장되는 여행이 아니라 지정된 루트만을 얌전하게 돌아야 하는 동물원 사파리와 다를 바 없다고 폄하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 권기봉
그렇다고 금강산 관광의 의미를 막무가내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북한 주민들을 직접 만나보고 대화할 수는 없지만, 그 동안 편광 필터를 끼워놓은 듯한 제도 교육과 제한된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해 왔던 북한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코로 숨쉴 수 있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적잖은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인류'라는 오해의 벽을 차츰 무너뜨릴 것이다. 또 북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지나친 경계심과 감정적 이질감을 해소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차제에는 북한 사람들도 현재의 우리처럼 남한을 방문하고 여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서로에 대한 다가서기'가 가능할 테지만, 경제 여건상 아직은 힘든 것이 사실이기에 조금은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도록 하기 위해 이 많은 청년들이 지금 이곳에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손 흔들었고, 그들은 우릴 보고 손 흔들었다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태양은 금강산 자락에 걸려 있고, 쭉쭉 뻗은 아름드리 육송들로부터는 어디 숨었는지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가 들려왔다.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 깊이 새겨진 바위만 없으면 그저 한적한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다.

도로를 따라 온정리까지 이어져 있는 철망 너머로는 원산까지 연결되는 철로가 달리고 있고, 그 너머로는 잘 포장된 시멘트 길이 보였다.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일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와 아이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가는 아주머니, 흰 블라우스에 검정 바지를 입은 여학생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친구와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오는지 족대를 어깨에 둘러멘 두 꼬마 역시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다. 지난 90년대 후반 경제난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일전에 사진을 통해 보았던 50~60년대 남한 사람들보다도 더 깡마른 듯한 모습이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은 듯 그저 걸쳐 입은 듯한 의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모습과 바위에 아로 새겨져 있는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남한도 아직 소득 분배가 투명하지 않아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긴 하지만, 북의 경우에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금강산 자락에 떨어지는 태양과 금빛 노을.
금강산 자락에 떨어지는 태양과 금빛 노을. ⓒ 권기봉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반가운 인사들이 오간다. 어쩌면 이 멋진 풍광과 정겨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어렵고 복잡한 생각일랑 잠깐 접어둘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다. 남이나 북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일까. 가슴을 짓누르는 심란함은 가라앉지 않지만 철망 너머 양지마을의 3층짜리 아파트, 즉 '다층 살림집'에서 신기한 듯 행렬을 내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보아하니 그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어댔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고, 그들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8.15km를 걷는 청년들의 시선은 길이 아니라 길 옆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쉽기만 한 8.15km. 이 미련이 길을 늘리리라

오후 7시 17분 김정숙 휴양소 옆 온정리 텐트촌에 도착해 짐을 푼 일행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고즈넉하기만 한 금강산에서 첫 밤을 보낼 준비에 분주했다. 오후 어스름의 금강산 품 안에 안겨 몇 시간 전 걸었던 8.15km를 되새겨 본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지 이미 오래지만 아직 뚜렷한 진척이 없는 지금 '8.15km'의 의미는 한결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비록 광복절이 코 앞이라 마련된 일회성 행사라 할지언정, 10km도 안 되는 거리를 걸은 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지라도 여느 관광객들처럼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는 것과는 달랐다.

미련이 결국 희망을 싹 틔우리라.
미련이 결국 희망을 싹 틔우리라. ⓒ 권기봉
하지만 이 길이 결코 긴 길은 아니었다. 머리 속에서 일기 시작한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였고, 처음 체험하는 북녘의 내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길지 않은 길이었다.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북녘의 모습을 고스란히 두 눈에 담으리라는 마음의 준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온정리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서 걸어갈 수 없는 길.

어쩌면 이런 미련을 간직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그랬다던가.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비록 남과 북 사이의 '다가서기'가 세 살배기 걸음마 수준의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희망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있고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8.15km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길에 대한 미련을 고이 간직해서 돌아가야겠다. 그래, 우리네 가슴 속 한 켠에 자리한 미련이 결국 희망을 싹 틔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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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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