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여성·시민단체 대표단 10여명은 26일 오전 여의도 한나라당사를 방문, 최병렬 대표와 1시간에 걸쳐 면담했다.
이오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가 "호주제 폐지에 대한 최 대표의 전향적인 입장을 듣고 싶다"고 요구하자 최 대표는 "당내에서 폭넓은 논의를 거칠 것"이라며 "여러분들과 크게 다른 생각을 갖고있지 않은 의원들도 있으니, 우리당이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룰지 지켜봐달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고은광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의원들은 내년 총선에서 낙선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병렬 "총선 앞둔 시점... 폐지 찬성하면 타격 입을 수 있어"
고은광순 "그렇다면 총선에서 심판할 수밖에..."
최병렬 대표는 이날 시민·여성 단체와의 면담을 시작하면서 정치인의 현실을 내세웠다. 최 대표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 소속 의원들 입장이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엄연한 상식"이라며 "(호주제 폐지를) 찬성했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총선 때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이해를 구했다.
최 대표는 또 "국회의원은 총선이 상당히 부담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얘기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고은광순씨는 "대구가 지역구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도 '이젠 시대가 달라졌고, 여성이 무시당하고는 살 수 없다'며 (호주제 폐지에) 찬성했다"며 "국회의원은 유권자를 의식해 표만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해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그러나 최 대표는 "박근혜 의원이 용기있는 말씀을 하셨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호주제 폐지 문제가) 제기된 타이밍이 총선 직전이기 때문에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말했다.
그러나 고은광순씨는 최 대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렇다면 총선에서 심판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서주원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호주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호주제를 폐지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은 없다"며 "그렇다면 국회에서 법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총장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지만 정책적인 문제에 대한 대립은 보이지 않는다"며 "한나라당이 정책정당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호주제를 폐지하면 괜히 그냥 기분이 나쁘니까 지역 여론을 내세워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것 같다"며 "호주제 폐지를 찬성하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면 낙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임해주기 바란다"고 압박했다.
백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호주제 폐지 1기 홍보대사인 최병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변호사)도 거들었다. 최 변호사는 "호주제를 폐지하면 가정이 해체되고, 고유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라며 "호주제는 일제가 통치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회장이 최 대표에게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고 묻자 최 대표는 급히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난 반대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웃었다.
김영선 여성 대변인 "호주제 폐지 관련 시민단체 낙선운동은 잘못"
이날 면담에 참석한 전재희 정책부위원장은 시민단체 대표단에게 "대표의 개인 의견이 있다고 해서 대표의 뜻이 곧 당론인 시대는 지났다"며 "난 개인적으로 호주제 폐지를 찬성하지만 앞으로 다른 의원들을 만날 때 그 분들을 공격하지 말고, 이해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김영선 대변인은 "호주제 문제의 핵심인 상속우선순위, 친양자제도 문제에 대해 우리당이 합의한 내용을 보면 호주제는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라며 "이것을 가지고 시민단체에서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또 "시민단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총선에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져가는 것"이라며 "이슈를 뜨겁게 할 수는 있겠지만 순수성과 원칙을 견지해야 할 시민단체로서는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병렬 대표는 면담 마무리 발언을 통해 "남편이 죽고, 어머니가 가계를 전담함에도 핏덩이 자식에게 호주상속이 이뤄지고, 호적에 개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기록해놓고 드러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며 자신의 주변 사례를 제시한 뒤, "특히 요즘 이혼을 많이 하는데 새 남편과 아이의 성이 달라 딱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며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그러나 "당내에서 폭넓은 논의를 거쳐 당의 입장을 정할 것"이라며 "국회의원들이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현실"이라고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여성·시민단체는 이날 최병렬 대표 등에게 호주제 폐지 정부 법안과 각종 쟁점, 선언문, 설문조사 결과 등을 전달했다. 이날 면담에는 하유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 공동대표와 이춘호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등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