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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지난 2000년 대학로에서 열린 3·8여성대회 가두행진 모습.
"호주제 폐지!" 지난 2000년 대학로에서 열린 3·8여성대회 가두행진 모습. ⓒ 우먼타임스 장철영

드디어 호주제에 관련된 법무부의 민법개정안이 윤곽을 드러냈다. 지난 5월 호주제폐지를 위한 민법개정안이 국회의원의 발의로 제출된 이래 정부 또한 여성부·문광부·법무부·시민단체로 구성된 호주제폐지특별기획단과 법무부 내부에 가족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재 제기되고 있는 호주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이번 민법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1)호주제 폐지 및 용어의 삭제 2)호주제를 대체할 새로운 신분등록제로 개인별 신분등록제의 채택 3)자의 성과 본 선택의 유연성 등을 들 수 있다. 호주 이외의 식구를 '가족'이라고 분류해왔기 때문에 이제 '호주' 용어가 사라짐으로써 '가족'이라는 용어도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가족의 해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딸이 결혼하면 더 이상 '가족'이 아니고, 분적한 아들 역시 호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가족'이 아니라고 정의했던 그간의 법적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부모는 여전히 1촌이고 형제·자매·조부·조모는 여전히 2촌이다.

호주제를 대체할 새로운 신분등록제로 '가족부'와 '개인별 신분등록'이 제기되어 왔으나 최근 한국가족법학회의 연구용역결과에서도 나타났듯이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응할 수 있고, 국적·가족관계 등 신분공시기능은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개인별 편제방식이 가장 만족스러운 대안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본가족별 편제방식(가족부)은 개인별 등록제를 향한 과도기적인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법무부가 오랜 검토 끝에 '개인별 신분등록'으로 결정한 것은 일제잔재의 일소 뿐 아니라 모처럼 우리가 현행 일본의 신분등록제(가족부)의 문제점을 극복한 보다 진화된 신분등록을 갖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 성·본의 문제에서 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혼인신고시 부부가 합의한 바에 따라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도록 하고, 혼인외자가 인지된 경우 자는 부모의 협의에 따라 종전의 성과 본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거나, 자의 복리를 위해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부·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 변경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는 남자만 '씨'가 있다는 무지를 바탕으로 일각에서 주장되어온 '성씨 불변의 원칙', '혈통 불변의 원칙'을 깼다는 의미에서 환영할 만 하다.

다만 합의에 따라 부·모의 성을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던 지난 5월에 발의된 의원입법안보다는 조금 뒤로 물러선 것이나, 유림들을 의식해 아무 의미도 없는 본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본이라고 하는 개념도 모계를 철저히 소외시키고 부정해온 가부장적 허구 아닌가.

호주는 '집안의 기둥'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럿을 함께 묶어 기록한 호적의 기준자일 뿐인데 그간 남성우선의 승계순서를 법에 못박음으로써 공적인 족보인 것처럼 인식되는 법감정을 생산해왔다. 처의 부(夫)가입적을 강제함으로써 부부차별을, 자식의 부(父)가입적을 강제함으로써 부모차별을, 혼외자가 승계에서 아내와 딸들에 앞서는 등 남녀차별을 조장해왔다.

해마다 UN이 발표하는 바 여성의원비율,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여성권한척도가 2003년에도 70개국 중에서 63위를 차지함으로써 여전히 바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 이와 같이 여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제도적으로 차별해온 '남성중심국가'였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여성법조인들은 줄곧 호주제폐지를 주장해왔고, 1997년 여성단체들은 호주제폐지를 남녀성비파괴 해결을 위한 선결과제 1순위로 꼽았으며, 드디어 2000년에는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한 바 법 전문가들은 조만간 위헌판결이 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위헌판결이 나기 전에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국회의원들은 그나마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위헌판결이 날 것이 분명한 악법을 지역의 유권자 핑계로 우물쭈물 끼고 있다면 얼마나 스타일 구기는 일일 것인가.

호주제폐지에 찬성하지 않는 대표적인 핑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도시와 농촌은 다르다. 곧 이어 총선을 앞두고 타격을 면하기 힘든 결정을 하기는 힘들다. 함부로 공개하기 조심스럽다. 옳고 그름의 판단 못지 않게 선거와 밀접하게 관계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한나라당 최병렬·최연희 의원 등)

"나는 개인적으로 호주제폐지에 찬성하지만 근친혼 예방책이 있냐는 질문이 많다."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 등)

"대선 때 이슈로 떠오른 것 아닌가. 한나라당 내에 호주제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시간을 두고 설득해야 할 문제지 급하게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아직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지 않다." (한나라당 김영선·심규철 의원 등)

"혈통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며 이혼한 여성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민족사에 대한 도전, 호주제는 전통이고 역사의 침전물"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 자민련 김학원 의원 등)


내용은 위와 같이 다양하지만 요약하면 국회의원들 스스로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유권자에게 끌려다니고 있다거나, 남자만 씨가 있다는 무지에 절어있다는 두 종류의 자기고백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유권자가 남자만 씨가 있다고 믿는다면, 여성에게도 씨가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유권자가 근친혼을 걱정한다면 모계를 부정하는 혈통계산법은 잘못되었다고 이해시켜야 한다. 시민단체가 5·6년째 목청 높여 외치고 있다면 진즉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 제청 들어간지가 언제이고, 드라마에서 호주제가 소재가 된 것이 몇 번째이고, 거리에서 서명을 받기 시작한지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공감대 타령이란 말인가.

아니, 호주제 만들 때는 여성들이 공감대를 형성해서 만들었던가? '민족'에 끼지도 못할 '이혼녀'들에게 호통을 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최병국, 김학원 의원들의 주장은 압권이다.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시려면 다른 혈통의 여성과 혼인하시면 안됩니다. 복제를 하시던지, 근친혼을 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더 있겠는지요?)

고은광순
고은광순 ⓒ 오마이뉴스 이종호
공격을 하지말고 이해를 시키라지만… 우리 여성들의 마음은 바쁘다. 내년 총선에는 기필코 남녀 모두 절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건강한 상식을 가진 대표들을 뽑을 것이다.

변화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데, 사회적 약자에게 늘 호통을 침으로써 재미를 보아왔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귀한 에너지를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9월 20일 여의도에서, 10월 3일 시청 앞에서 여성들의 분노는 새 하늘 새 땅을 열 희망의 에너지로 바뀌어 내년 총선을 거쳐 앞으로 두고두고 펼쳐질 모양이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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