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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긴수이 여관 정원
눈이 내리는 긴수이 여관 정원 ⓒ 박도
2003년 2월 12일 아오모리 눈, 서울 맑음

새벽 4시, 귀국하는 날이라 일어난 후 가방을 꾸렸다. 일본 입국 후 책자와 유인물을 주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챙기다 보니 엄청 많았다. 중복된 것, 불필요한 것을 가려낸 뒤 봉투에 가지런히 담아 가방에 넣었다.

그런 뒤 취재 노트를 정리하고는 대욕탕으로 갔다. 대욕탕의 탈의실과 화장대의 청결과 정돈에 입이 벌어지고 기가 막혔다.

화장대
화장대 ⓒ 박도
탈의장
탈의장 ⓒ 박도

내가 첫 손님인듯, 탕에서 일녀 종업원이 마무리 정돈을 하고 나오면서 “아리가도 고자이마스”라고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다른 욕탕과는 달리 탕과 내부가 모두 나무였다.

탈의실 벽에 있는 기록을 띄엄띄엄 읽어보니, 이 욕탕 내의 나무는 모두 회(檜)나무로, 수백 년 된 것들 중에서 낙뢰나 지진으로 고사목(枯死木)이 된 것만을 골라 다듬어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발바닥 촉감과 나무 냄새가 좋았다.

욕탕에 놓인 화병
욕탕에 놓인 화병 ⓒ 박도
탕 둘레 모서리에는 꽃을 담은 화병이 있었다. 예사의 심미안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거기다가 화병을 놓아두지 못했을 것이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자 천국이 여긴가 싶었다. 유리 한 장 사이로 여관 정원이 환히 보였다.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서설(瑞雪)이 펄펄 내렸다.

탕을 나오자 여종업원이 어귀에서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면서 “오차”라고 말했다. 좋다고 했더니 곧 시원한 차를 가지고 왔다.

하이쿠 투구함이 놓여 있는 간이 휴게실
하이쿠 투구함이 놓여 있는 간이 휴게실 ⓒ 박도
욕탕 들머리 구석에는 탁자와 등나무 의자 네 개가 마련돼 있었다. 자리에 앉아 오차를 마시자 간장까지 시원했다.

탁자 곁에는 화분, 그리고 ‘하이쿠 투구상(俳句投口箱)’이라는 상자가 놓였고, 그 옆에는 여관주인이 손님에게 하이쿠 한 수 남겨 주시면 영광이겠다는 글과 함께 시를 쓸 수 있는 종이와 볼펜, 그리고 지난 손님들이 남긴 하이쿠를 인쇄해서 책자로 묶은 하이쿠집이 있었다.

호기심에 하이쿠 집을 펼쳐 봤더니 오래 전부터 이 여관을 숙박한 수백명의 글이 담겨 있었다. 내가 책자를 골똘히 보고 있는데, 운전기사 이즈미야씨가 목욕을 끝내고 오차 잔을 들고 종업원과 함께 내 자리로 왔다. 그러면서 나에게 한 수 남겨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일본인들에게 문화 전수한 반도인의 후예 문사가 어찌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 있으랴. 나는 이들이 쓴 글을 훑어서 대충 하이쿠의 형식을 감 잡은 후 메모지에다 적어 보았다.

정원 전망용 의자
정원 전망용 의자 ⓒ 박도
春雪亂紛紛
南津輕似神仙境
過客溺恍惚
(봄을 재촉하는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는구나
흡사 남쪽 츠가루 지방은 신선의 경지로다.
지나가는 나그네 황홀경에 빠졌네.)


운이나 제대로 맞았는지 모르겠다. 이즈미야 기사와 일녀 종업원은 메모지를 돌려 보고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서명 후 투구상자에 넣기를 권했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나는 일본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를 이 하이쿠 즉흥 습작을 상자에 넣고는 객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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