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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구본주 작가
생전의 구본주 작가 ⓒ 네오룩닷컴
한국 미술계의 주목받던 젊은 작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9월 29일 새벽 5시 고인이 되었다. 올해로 37세였던 조각가 구본주씨는 지인들과 밤늦은 회식자리 후 귀가하던 중 짙은 안개 속을 달리던 트럭에 변을 당했다. 작가를 데리러 차를 갖고 나온 부인이 도착한 것은 사고 직후 채 2분도 못된 시간이었다. 앰뷸런스는 사고가 난 후 30여 분이 지나 도착했다.

작가 구본주는 홍익대학교 조소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수 많은 국내외 기획전과 조각 심포지엄 등에 참여해 왔다.

그는 1993년 MBC 한국구상조각대전의 대상과 1995년 모란미술대상전에서 '모란 미술작가상'을 수상했다. 소 조각회, 홍익 조각회 등의 단체전에 출품했으며, 민족미술인협회 이사로 일해왔다. 유족으로 아내 전미영과 슬하에 1녀1남을 두었다.

1일 새벽, 시신이 안치된 의정부 성모병원에는 지인들과 선후배들이 모여 오전 9시 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미술인협회의 이사를 맡고 있는 안성금(작가)씨는 구본주 작가가 민족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소처럼 우직한 작가였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지난 토요일에도 문예진흥원과 민족예술인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있는 ‘아시아의 지금’ 전시회 심포지움에 질의자로 참가했었지요.”

장례식장을 방문한 최태만 미술평론가(국민대 미술학부)도 "힘든 작업을 기피하는 경향속에서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단단한 기초를 가진 모범적인 작가였다"고 말했다. 역사 의식과 소명 의식을 갖고 사회현실에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의 작업에 자긍심을 갖는 성실한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최태만 교수는 구 작가가 구체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형상 조각에 있어서, 주제 의식이 분명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했다. 구씨에 대해 최 교수는 "재료가 주어지면 재료에 굴복당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재능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의 경험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장례식을 돕고 있는 후배 김준기(사비나 미술관 학예연구실장)씨는 고인을 '둔탁함과 날카로움의 작가'라고 표현했다. '둔탁함'이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우직함은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작품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나타는 예리함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선배가 민중민술과 진보미술에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잘 보존하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많은 이의 가슴에 빛으로 남을 테니까요."

그는 지난 화요일 인사동에서 고인을 만나 ‘민중미술’의 상(相)에 대해 논쟁을 벌인 자리에서, "자신은 미술인회의에서 제도개혁을, 선배는 민족미술협회에서 미학적 개혁을 고민하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 했었다"며 재능있는 젊은 작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갑오농민전쟁-저항>,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노동>, <미스터 리> 등의 작품을 남긴 고인의 빈소에 이틀동안 모두 2000여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고, 10월 1일 오전 9시 발인을 마치고 지인 1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도 포천에 있는 고인의 작업장 뒤에 시신이 안치됐다.
구본주_혁명은 단호한 것이다_철, 나무_600x350x450cm_1990
구본주_혁명은 단호한 것이다_철, 나무_600x350x450cm_1990 ⓒ 네오룩닷컴


"남편은 현실주의를 작품으로 잘 표현한 작가"
[인터뷰]부인 전미영(조각가 ·35)씨

▲ 부인 전미영씨와 큰 딸 세모(3)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대학 3학년 때 처음 알게 되었어요. 구 작가는 홍대 조소과를 다녔고 저는 성신여대 조소과였지요. 서울에는 5개의 조소과가 있어, 같이 작품하며 운동을 하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요. '작은 조각전'에서 구작가의 '파업' 이라는 작품을 보고 '판화나 회화가 아닌 조각으로도 민중미술을 구현할 수 있구나!'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로 작품 하나 하나가 다 다르고, '다음엔 뭘 만들까' 상상을 불허했어요."

-광주 시립 미술관에서 가질 초대전의 작품 제작에 들어간 상태에서 사고가 났지요. 작가로써 남편으로써 고인은 어떤 사람 이었나요?

"인간으로써의 성격이나 단점들이 작품으로 해소됐어요. 가족주의 틀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어요.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많았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치이고 들어오면, 저는 그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니까 '그건 왜곡된 평가다'라고 말해주었죠. 항상 칭찬만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는 항상 제 말은 '신빙성이 없다'고 말했죠.

그렇게 재충전, 재무장시켜서 내 보내고,돈 많이 벌어오라고 했어요. 결혼 후 1, 2년 동안 작품은 미루고 학원에서 일을 해야 했어요. 사고 당시에도 환경 조형물(건물 앞에 세우도록 하는 조형물)을 맡고 있었죠.

그 돈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선산을 구할려고 자리를 보고 다녔는데, 결국 자신의 자리를 보고 다닌 셈이 돼 버렸어요. 구 작가는 현실주의를 조각으로 잘 풀어낸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구상이 떠오르면 그 작품이 끝날때까지 아이처럼 늘 제게 자랑하는 성격이었어요.

그가 올 11월과 내년 6월의 전시회를 위해 계획했던 작품들을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그의 작품을 가진 분들의 양해를 얻어 추모전을 열 계획입니다."
/ 전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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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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