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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10년 전쯤이었다. 우리가 살던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었다고 한다. 나무 둘레가 얼마나 큰지 어른 너 댓 사람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였다. 동네 어르신들이 나무 그늘아래 앉아 장기를 두기도 하고, 막걸리 추렴을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객들이 잠깐 쉬었다 가기도 한다.

가을이면 동네 사람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상수리를 줍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든다. 떨어진 상수리는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온 동네 사람들이 먹을 만큼, 많은 양의 상수리가 열리고 알도 굵직하고 실하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니 바람만 조금 불면 애들이고 어른이고 가릴 것 없이 나와서 상수리를 줍는다. 아내와 나도 시간만 나면 심심풀이로 그 상수리나무에 달려가서 상수리를 주웠다. 한 달정도 주웠더니 두어 말쯤 되었다. 우리 집만 그렇게 주운 것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정도쯤 주웠으니 한 나무에서 얼마나 상수리가 많이 열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느릿느릿 박철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상수리 가루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먼저 상수리를 거적에 널어 잘 말린 후 넓적한 돌을 굴려 상수리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처음 하는 것이니 어설프기 짝이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든 껍질을 다 벗겼다.

그 다음은 방앗간에 가서 상수리를 빻아왔다. 걸쭉한 게 꼭 곰삭은 된장 같다. 그 다음은 자루에 넣고 물을 부어가며 손으로 주무르면 상수리 가루는 자루구멍으로 빠져나오는데, 물을 함지박에 가득 채우면 상수리 앙금만 가라앉게 되고, 물은 조심스럽게 따라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배운 대로 했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걸쭉한 상수리가루 덩어리를 자루에 넣고 물을 부어가며 주물럭거렸다. 그랬더니 뽀얀 상수리 녹말이 빠져나온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주무르라고 했기에 아내와 나는 열심히 자루를 주물렀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자루 위에 올라가 빨래 밟듯이 밟았다. 남들에게 배운 대로 다 했다.

ⓒ 느릿느릿 박철
앙금이 바닥에 잘 가라앉기를 바랐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싶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만 지나면 앙금이 다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는데 뿌연 물이 그대로 있고 앙금이 가라앉질 않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나니 상수리 물에서 쉰내가 난다. 배운 대로 했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자루가 문제였다. 고운 천으로 만든 자루에 넣고 짜야 하는데 우리는 아무 자루면 어떻겠나 싶어 정부미 자루에 넣고 짰으니, 상수리 건더기까지 밖으로 삐져나와 앙금이 가라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상수리 건더기가 밖으로 삐져 나오면 녹말이 잘 가라앉질 않는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물도 좋아야 한다. 물이 나쁘면 상수리 녹말이 잘 가라앉지 않는다. 뿌연 물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서양격언이 있던가. 지금은 실수 없이 잘 한다. 일단 물이 좋아야 하고, 자루는 고운 천으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실패하고 만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걸쭉한 상수리 덩어리가 좋은 물을 만나고 고운 천을 통과하는 동안 모든 건더기는 그대로 남고 상수리 녹말만이 통과해야 한다. 거기에 물을 가득 붓고 가만 놔두면 상수리 녹말이 저절로 가라앉는다.

ⓒ 느릿느릿 박철
상수리 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한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세상에 수고와 정성 없이 되는 일이 있는가? 상수리 가루는 일년이 지나고 몇 십 년이 지나도 변질이 없다. 햇상수리 가루라고 더 좋은 것이 아니다. 고운 천과 물을 통과하여 건조된 상수리 가루는 절대 변질되지도 않고 벌레도 나지 않는다.

세상 이치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험해도 세상 탓, 다른 사람 탓, 환경 탓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좋은 물이 되면 된다. 그리고 내가 고운 천이 되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로 인해서 쓸모 있는 것들이 만들어진다.

부끄러운 세상에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사람이다. 산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며 바람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세상이 잘 되고 못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손에 달려있게 마련이다. 선악을 알아서 짓는 것은 사람밖에 없는 까닭이다.

들에 핀 꽃은 선악이 무엇인지 미추(美醜)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사람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 오직 사람의 문제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커다란 함지박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다음 날 물을 따라버리고 나면 바닥에 상수리 녹말 앙금이 단단하게 붙어있다. 참 신기하다.

ⓒ 느릿느릿 박철
좋은 물과 함께 고운 천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물이 되고 고운 천이 되면 그만이다. 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혼탁해도 내가 그것을 잘 걸러내면 된다. 그것은 나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도,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올해는 상수리가 많이 달리지 않아 많이 줍질 못했다. 지금 아내가 상수리 껍질을 까면서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툴툴거린다. 지금이라도 아내에게 달려가야겠다. 항시 말만 앞서는 것도 문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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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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