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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국
한동안 구석에 밀쳐뒀던 카메라 가방을 정리하기 위해 꺼냈습니다. 하얀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흑백 필름. 한동안 카메라를 만져본 기억이 없었기에 어떤 것이 찍혀 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밤 늦게 주머니에 필름을 넣고 현상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암실로 가는 동안 어디 놀러가서 찍은 사진들이겠거니 짐작해 볼 뿐입니다.

오랫만에 시큼한 약품 냄새들을 맡으며 현상을 하고 필름을 물에 씻었습니다. 빨래집게에 매달린 필름에는 지난 여름 아이의 목욕 사진, 밭일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듯 모를 듯한 여러 곳의 풍경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진, 어머니는 시골 아주머니 모습 그대로입니다. 한 뙈기 밭에 심은 고추가 모질게 내리던 비와 태풍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작년의 반만큼이나마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억척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한여름 내내 땀 흘리며 고추 농사 지은 결과는 근당 오천원씩 해서 삼백근, 150만원이었습니다. 올해는 비와 태풍이 잦아 근당 만원, 백이십근, 120만원. 우리 부모님 여름 농사의 전부입니다.

나이보다 흰 머리카락이 성성한 어머니가 장터 미용실에서 염색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진입니다. 아내는 나의 정수리에 가득 돋힌 흰머리를 보며 '당신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나이 서른에 새치도 아닌 흰머리가 자라는 것을 보니 효자 노릇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거울에 정수리를 비춰보며 부모님의 눈이 침침해진다는 것을 오히려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 조경국
두 번째 사진,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가 함께 있는 사진 속 배경이 되는 집은 두 달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사셨던 곳입니다. 아마 외할머니께선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을 하고 계셨을 겁니다.

아이는 그 집 문 앞에만 서면 "징조(증조할머니) 갔다. 멀리 갔다"고 이야길 합니다. 외할머니께서 아이에게 남긴 것은 '징조'라는 외할머니를 뜻하는 단어 하나와 탯줄을 끊자 입혔던 배내옷뿐입니다. 그날도 이젠 시간 저편으로 물러난 것 같았는데 흑백 사진으로 보니 말라가고 있던 기억의 줄기가 다시 되살아납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던 그때 어머니는 어디론가 바삐 뛰어갑니다. 아내와 아이는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 천하태평입니다. 그 앞에서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고, 마당에 널어뒀던 것들을 거둬야할 시간이었습니다.

ⓒ 조경국
세 번째 사진, 그리고 아이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저에게 달려옵니다. 그리고 렌즈에 손가락을 대고 "아빠 사진, 사진"하며 신이 났습니다. 여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밭고랑 사이에서 놀던 아이는 나 어릴 적처럼 까만 얼굴과 종아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억의 조각들이 사진 속에서 이음새를 메워 갑니다. 몇 개월 전 찍어둔 사진 속에 나는 과거가 현재인 것처럼 존재합니다. 비와 무더위 밖에 생각나지 않는 지난 여름의 기억 속에 그 날의 장면들이 촘촘히 박힙니다.

지난 여름은 한 장 사진 속에 가둬지고, 시간은 벌써 찬 바람과 함께 늦가을로 들어섰습니다. 갑자기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기억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 돌아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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