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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한국에서 10월은 시월(詩月)이라고 해서 여름내 던져두었던 시집들을 다시 꺼내 읽고 신춘문예에 투고할 시들을 짜내느라고 괜히 마음이 바빴는데, 이곳에서 맞이하는 10월은 겨우내 묵혀두었던 정원의 텃밭에 씨를 뿌리고 지저분한 정원 구석구석을 손질하느라 몸이 더 바쁩니다.

꽃보다 단풍의 고운 빛깔을 더 사랑하는 아내도 이곳에서 맞이하는 햇살 따가운 10월의 봄이 아직도 낯선 듯 달력을 쳐다봅니다. 한국에서 인쇄되어 태평양을 건너온 그 달력의 10월 사진 속에는 곱게 물든 나뭇잎들과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이 몇 개 달려있는 감나무가 서 있습니다. 익숙한 우리의 가을 풍경이지요.

물론 이곳도 사계절이 있어서 여름과 겨울 사이의 짧은 오솔길을 가을이 통과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날씨는 겨울이라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가을도 그저 조금 덜 더운 여름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래서 급격한 일교차와 강한 햇빛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고운 단풍을 이곳 오클랜드에서 만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낙엽은 있어도 곱게 물든 단풍은 없는 오클랜드의 가을, 이민 와서 아내가 가장 서운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단풍이 없는 10월이지만 그래도 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보다는 나아서 아내와 나는 빨리 봄빛이 따사로운 10월이 오기만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 10월을 기다린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더군요. 집 정원에서, 길에서, 공원에서 만난 나무들도 오랜 기다림을 화려한 색깔과 은은한 향기의 꽃으로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 정철용
이 봄에 가장 먼저 만난 것은 10월도 되기 전에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꽃이었습니다. 보타닉 가든의 동백나무 숲은 몇 년 전 여수 오동도에서 보았던 것처럼 온통 붉은 꽃으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가보았을 때, 참수당한 죄수의 목처럼 여기저기 꽃송이째 떨어져 있는 동백꽃들은 무참했습니다. 김 훈의 말대로 동백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잇는 목련꽃은 그 무참한 동백꽃의 주검들을 위로하는 조등(弔燈)입니다. 내가 눈부시게 화사한 목련꽃의 색깔에서 봄의 기쁨보다는 어떤 아련한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더군요.

최근에 읽은 책에 보니 목련은 꽃이 필 즈음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한다고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겨울 꽃눈의 끝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비율이 반이 넘는다는 것이지요. 아, 그랬었군요. 목련꽃에서 느끼는 내 슬픔은 저 목련꽃처럼 내 마음에도 늘 북반구의 모국을 향하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연분홍 구름처럼 피어난 벚꽃들입니다. 마치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들의 재잘거림처럼 일시에 피어나는 모습도 그렇지만, 가벼운 미풍에도 쉽게 꽃잎을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는 딸아이의 경쾌함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꽃그늘 아래 벤치에 오래 앉아 있고 싶은 내 마음이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딸아이는 알기나 할까요?

ⓒ 정철용
그러나 봄날은 짧아서 10월에 가을 단풍 대신 우리를 찾아온 봄꽃들은 하나 둘 땅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문득 그렇게 떨어진 꽃들이 내년 3, 4월쯤 여수 오동도의 동백꽃으로, 경부고속도로 서초 인터체인지 부근의 목련꽃으로,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도로의 벚꽃으로 다시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봄꽃들을 담은 편지를 그대에게 쓰게 만든 이유입니다. 몸은 비록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 마음은 늘 고국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그곳에도 역시 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서로를 연결시키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끈이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내 안부가 궁금해지거든 지금 한창 곱게 물든 단풍을 보고 그런 색깔로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눈치 채시기를. 나 또한 10월에 피어난 봄꽃들에서 그대가 지난 봄에 내게 건넨 그리움의 말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 정철용
그 그리움의 말을 읽다가 봄이 다 갔습니다. 이제 우리 집 울타리에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린 등꽃이 여름을 향해 익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향기로운 등꽃 내음에 집안이 온통 환하고 10월의 단풍을 그리워하던 마음도 이젠 향기만 남아 달력 속 단풍잎에서도 그 색깔을 보는 게 아니라 향기가 맡아질 지경입니다. 그 향기를 여기 조금 담아 보냅니다.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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