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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0월 3일 춘천 외도(고슴도치섬)에서 열린 '사진전시회'에서 이뤄진 이외수씨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쓰여졌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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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모든 사람은 장애인입니다"

춘천 한림대학교 부속병원 인근의 이외수씨 집은 생각과는 달리 평범한 도심의 집이다. 밖에서 바라본 그의 집은 안을 들어다 볼 수 없도록 앞면 전체가 막혀 있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닫힌 문 옆에는 안에서 확인이 가능한 인터폰이 설치되어 있었다.

▲ 장시간 대화에서 피곤해지자 잠시 누워서
ⓒ 이철용
어서 들어오라는 말에 열린 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밖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대문 왼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화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긴 것은 두 마리의 견공들이다. 이메일까지 있다고 하는 그 견공들은 주인을 반기는지 꼬리를 흔들며 함께 온 우리에게 전혀 경계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높은 천장의 밝은 거실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거실의 가운데는 상당히 큰 낮은 원탁탁자가 놓여 있다. 그 중앙에 2천 조각 맞춤의 모나리자 상이 들어 있다. 거실에는 노래방 기계도 있고 지붕에는 노래방에서나 볼 수 있는 회전조명등도 달려 있다.

그는 이 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를 천장이 높아서라고 한다. 심리적으로 천장이 높으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 있으려고 하고 반대로 천장이 낮으면 자꾸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지붕이 높은 것에 반해 마련했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 청중보다 더 큰 감동 받은 연주가

그의 말에 의하면 춘천이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하지만 장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것이다. 호수와 산이 있고 4계절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천혜의 자연을 가진 도시라고 하지만 춘천에서 건물 치고 병원 이외에는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제대로 설치된 곳은 거의 없다. 비근한 예로 한 아파트에서는 장애인이 자신의 사비를 들여 편의시설을 만든 것을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원상복귀 하라고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올해 봄 이렇게 좋은 자연을 자신만 즐기는 것이 아쉬워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를 기획하고 현재 뉴욕시티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인 성악가 이윤아씨를 그가 개인적으로 초청했었다.

이 행사는 장애인들을 위한 행사로 특별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많은 준비를 하고 초청을 했다. 이날 행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삼성애견학교의 도움을 받아 안내견을 준비하고 포스터와 안내장, 팸플릿도 시각장애인의 언어인 점자로 제작을 했다. 부제도 시각장애인에 맞춰서 "귀로 본다"였다.

▲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든 음악회 점자 전단지와 팜플렛
ⓒ 이철용
점자 인쇄물은 일반 인쇄보다 절차도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자료를 만들지 않고 단순히 장애인을 무료로 초청하는 것은 제대로 된 장애인을 위한 연주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제대로 된 연주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제껏 연주회에 안내견이 들어간 것은 한국의 공연 현실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연주홀에서는 연주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연주홀 안으로 들이지 않고 있다.

많은 비용을 들여 기획한 연주회는 안타깝게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시각장애인 장영섭씨의 송내역 추락참사로 인해 장애인 단체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져 예정되어 있었던 장애인들이 참가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300여명 정도를 예상했었다.

5월 18일 춘천 한림대 일송아트홀에서의 연주회는 예정된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감동의 물결이었다. 이날 제일 큰 감동을 받은 사람은 청중보다도 연주가로 초청된 성악가 이윤아씨였다.

그는 관중들의 5번에 걸친 앵콜을 마다하지 않았고 특히 시각장애인의 안내견들이 조용히 자신의 공연을 관전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한국 방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연 이틀 후 그는 뉴욕에서 오디션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큰 감동을 안고 돌아간 그에게 오디션의 결과는 당당한 프리마돈나였다. 그는 전화를 걸어 자신이 프리마돈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의 장애인과 함께 하는 연주회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춘천의 감동이 자신을 세계적인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최면 당해 살아가는 사람들

이외수씨는 요즘 사람들이 현실에 최면당해서 자신이 엄청난 장애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육체적 시각장애인보다 물질에 눈이 먼 사람이 더 끔찍한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한다.

▲ 글을 쓰기 전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이외수씨
ⓒ 이철용
그의 작품 중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다양하다. 지체, 시각, 청각, 정신 등 대부분의 장애 영역을 다 포괄하고 있다. 소설 <황금비늘>에는 시각장애인 부부가 등장한다. 당시의 시대 배경은 조선시대이다.

이것을 쓰기 위해 조선시대의 시각장애인과 관련한 자료를 찾았으나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대동야사'라는 책 18권을 모두 읽었다. 이 자료에서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임금 때가 지금보다 장애인에 대한 정책을 더 잘 펼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는 관청에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책임졌던 기록들이 나온다.

그의 작품에서 한 꼬마가 묻는다. "조선시대에도 시각장애인들이 선글라스를 썼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았지만 여전히 자료가 없다. 이런 문제들이 하나 걸릴 때는 답변을 위한 자료 찾기에 수많은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그만큼 장애인을 소설에 등장시키는 것은 2, 3중의 고통스런 일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자료를 찾고 때로는 명상 속에서 스스로 장애인이 되어 동병상련의 경험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의 작품 속에 장애인이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특별한 의도라기 보다 태초 이래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아왔고 삶의 현장을 글로 옮기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나무젓가락의 사용은 멋이 아닌 가난의 산물

그는 소설, 시와 같은 글쓰기 외에도 미술활동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이 사용된다. 그의 작품에 사용되는 도구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무젓가락이다. 사람들은 그가 나무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에 역시 기인이라 그렇겠지 하는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나무젓가락, 크레파스 등의 도구는 그만의 독특한 취향이 아니다. 사실 지금은 독특해 보이지만 이것에는 그의 눈물이 배어 있다. 너무 가난해서 비싼 붓을 살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주변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잡았던 것이 나무젓가락이고 원래 교대를 다녔던 탓에 교사로 있는 선후배들에게 학교에서 아이들이 쓰다버린 몽당 크레파스를 모아달라고 해서 같은 색상으로 녹여 다시 재생해서 크레파스를 사용한 것에서 그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도구들은 가난이 그에게 선택하게 한 가난의 산물인 것이다.

또 다른 출발 "철가방 프로젝트"

그의 전공은 글쓰기와 미술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전공영역과 다른 분야에서 이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 "칼국수를 끓이면 수제비는 당연히 끓일 수 있지 않는가"로 답한다. 즉 모든 예술은 통한다는 것이다.

▲ 장애인들에게 바치는 글을 나무젓가락으로 쓰고 있다
ⓒ 이철용
그는 요즘 "철가방 프로젝트"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전직 중국집 배달부, 세차장 직원, 가수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하고 음반도 몇차례 출시했다. 이곳에는 '울고싶어라'로 유명한 가수 이남이씨도 열심히 활동중이다. 그는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한다. 그가 철가방프로젝트를 만든 것은 구성원들이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지만 세상 속에서 희망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활동에는 지역의 활동가들이 함께 하고 있다. 특히 젊은 목사들이 그와 함께 희망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 젊은 목사들은 시골에서 희망을 잃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아동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의 희망 만들기에 '철가방 프로젝트'도 함께 하며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공연을 하고 있다. 농한기에 마을에서 노름으로 보내던 사람들에게 공연을 통해 문화를 접하게 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것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들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최초의 목숨을 건 투쟁 "마임을 지켜라"

이외수씨에게 원고마감은 없다. 생활 자체가 일정한 스케줄을 만들어서 그것에 맞춰 놓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만나는 상황에 맞춰 생활하는 편이다. 때문에 원고마감이 있을 수 없고 탈고를 하면 그때가 원고마감일이다. 그는 일상적인 자유로움 속에서 하루에 한가지씩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자신의 몫을 감당한다.

그는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그 많은 시위에도 참가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몇 해전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은 한 마임니스트가 혼신을 다해 "국제춘천마임축제"를 해마다 열어 1만4천 명 이상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마임행사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춘천시가 방해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춘천시는 마음축제 당일 마라톤 대회를 열어서 행사장 부근의 교통을 통제했다. 이러한 시의 처사에 예총과 민예총이 하나가 되어 한 목소리를 내었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시청 앞에서 할복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싸움에는 그의 홈페이지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독자와 네티즌들이 동시에 춘천시청 서버에 접속해 서버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온라인 오프라인 시위의 중심에서 그는 목숨을 건 투쟁을 이끌었다. 결국 시장이 사과를 했고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몰아서 사인을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친필 사인을 한 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인을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인뿐만 아니라 낙관까지 찍어서 정성을 다한다. 그가 이렇듯 고단한 일을 하는 것은 유명세를 자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를 찾지만 사정상 만날 수 없음에 미안한 마음으로 최소한의 자신의 성의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대화를 마칠 무렵 노래나 한 곡 하자고 제안했다. "오늘은 휴일이니 휴식이다"라고 선언을 했다. 그는 일요일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도 하루는 쉬셨는데 나도 쉬어야지" 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 거실에 마련된 노래방 기기로 쌓인 피로를 씻는다.
ⓒ 이철용
노래방 기기에 전원을 넣고 "울고싶어라"를 구성지게 부른다. 천장에서는 조명등이 돌아간다. 한 곡을 부른 후 기기를 열고 이것 저것 만지며 직접 음향 조절을 한다. 그의 노래는 달랐다. 부르는 것이 아니라 토해내는 것이었다. 노래를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온 몸으로 불렀다. 저런 노래라면 시각장애인도 청각장애인도 감동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는 긴 시간 함께 했던 필자 일행에게 인사를 하기 전에 장애인들에게 바친다며 특유의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담배 두 대를 피우고 깊은 사색에 잠겨 던 그가 나무젓가락을 먹물에 묻혀 써내려 갔다.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므로써(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 장애인들에게 바치는 글 '길이 있음에... "
ⓒ 이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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