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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중에 요즈음처럼 야외로 나가기 좋을 때가 또 어디 있을까?

막바지 빨간 단풍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어 아이 유치원도 빼먹고 야외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남양주의 금곡에 있는 홍유릉이다.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가 잠든 곳이고, 유릉은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가 잠들어 있는 릉이다. 드라마 '명성황후'가 방송됐을 때는 수많은 참배객이 왔다는데 지금은 드라마가 끝나서 그런지 조용하다 못해 한적하다.

홍유릉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며, 최초의 황제릉 이기도 하다. 기존 왕릉과는 그 형식이 다르고 파격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 왕릉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가 쳬쁘다.
ⓒ 이종원
답사자는 입구 이정표를 보고 좌측으로 이어진 산책길로 먼저 들어설 것이다. 이 길로 가면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이기 나오기 때문이다. 아버지 릉을 먼저 보고 아들 릉을 보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산책길은 참 아름답다. 그저 걷기만 해도 가을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왕릉이라기보다 잘 꾸며놓은 공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왕릉 중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되어서 인공적인 냄새가 가미된 것 같다. 기존 왕릉의 고풍스런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가보다.

홍릉

늘씬한 가로수를 걷고 가을 단풍에 흠뻑 빠지다 보면 고종과 명성황후 릉인 홍릉이 나온다. 그동안 보았던 왕릉의 형식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조금은 충격을 받는다.

▲ 가운데 침전이 자리잡고 있다.
ⓒ 이종원
우선 정면에 정면 5칸 측면 1칸짜리 팔작지붕의 일자형 건물인 '침전'이 나온다. 난 처음에 궁궐건물인 줄 알았다. 창경궁의 '명정전'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기존 왕릉은 맛배 지붕에 '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이 기본이었다. 고종은 황제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릉제를 따랐기 때문에 이렇게 큰 건물을 만들어 냈다.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침전이 너무 커서 뒤의 봉분을 완전히 가려 답답하게 보인다.

▲ 침전
ⓒ 이종원
내부는 어떤지 문살 틈을 통해 쳐다보았다. 이것 역시 기본 틀에서 많이 벗어났다. 안에 침상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침전은 신위를 봉안하는 제전(祭殿)의 역할도 하고, 침상이 놓인 침전(寢殿)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계단은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인해 동쪽 측면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은 바로 정면에 계단이 놓인 것도 눈 여겨 볼만하다.

▲ 홍릉의 석물
ⓒ 이종원
가장 파격적은 것은 이곳에 놓인 석물들이다. 다른 왕릉은 보통 봉분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문인석, 무인석, 호석 등이 왕을 호위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봉분 위가 아니라 침전 앞에 일렬로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문인석, 무인석에다 국적불명의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양이 서 있어 마치 동물원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구한말 조선을 침탈하려는 열강들이 동물가면을 쓰고 있어 못내 씁쓸하다.

▲ 도무지 낙타처럼 보이지 않는다.
ⓒ 이종원
석공은 기린과 낙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저 상상해서 그린 것 같다. 도무지 낙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저 신났다. 동물 맞추기 내기도 해본다.

▲ 무인석
ⓒ 이종원
무인석의 키는 4m에 육박하여 조선 왕릉의 석물 중에서 가장 클 것이다. 서양인 얼굴을 하고 있어 친근감도 떨어진다. 더구나 상자에 갇힌 사람처럼 자세가 경직되어 부자연스럽다.

명성황후의 죽음

1895년 8월20일 아침 7시 일본군수비대 140여명과 일본 낭인들이 뒤섞인 무장행렬이 궁궐로 침입하기 위해 궁궐수비대와 총격전이 벌어진다. 총격전이 치열한 틈을 타서, 낭인 무리들은 은밀히 담을 넘어 왕궁에 진입하여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으로 밀고 들어간다.

궁녀들 틈에서 영문도 모른 채 떨고 있는 명성황후를 확인한 낭인들은 옷을 갈갈이 찢고 가슴에 일본도를 꽂는 등의 방법으로 처참하게 살해한다. 황후는 궁궐 우물에 처박혔다가 궁궐 뒤 사슴사냥터로 옮겨져 재만 태워버린다.

불과 100여전의 일이다. 조선왕조의 권위와 존엄의 상징하던 궁궐에서 자행된 만행이다. 민족의 자존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조선은 망국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 역사의 한가운데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있었던 것이다.

▲ 고목에 덩쿨이 자라고 있다.
ⓒ 이종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은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친척도 없는 상태에서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이런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민중의 아픔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며 그런 경험들이 획기적인 개혁정치를 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원군은 60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에 어지간히 신물이 난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세도정치가 되풀이되질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8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책봉한 것이다. 이 여인이 바로 근대사에 한복판에 선 명성황후 민씨다. 이 책봉이야말로 대원군 입장에선 일생일대의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훗날 민비 때문에 실각하고 청나라로 쫓겨가지 않았던가?

민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정치수완이 뛰어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아버지 대원군과 최대정적관계에 이르기까지 한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쫒겨가면서 며느리 민비에 대한 증오심도 함께 가져갔을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목숨 건 싸움 그리고 실권, 청나라 귀양, 복권, 명성황후 살해…. 이런 과정들은 동일선상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명성황후가 죽은 것에 대원군은 직접 관여는 하지 않았지만 묵인은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황실은 이합집산이 되고, 외압은 물밀듯이 들어오고, 민중은 도탄에 빠졌다. 어쩌면 조선 망국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 참도
ⓒ 이종원
유릉

역시 황제의 능제를 갖춰서인지 유릉 역시 홍릉과 조영과 비슷하다. 단지 참도 양옆에 놓여진 석물이 보다 구체적이고 아름답다. 직접 동물을 본 것인지 사실적이며 나름대로 개성도 지니고 있다. 아마 서양조각수법의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순종은 재위기간 4년동안 조선의 종말을 바라보는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어머니 명성황후의 시해를 목격했기에 일본의 존재에 무척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재위기간 내내 친일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일제에 주권을 내준 통한의 왕이기도 했다. 허울좋은 황제지 일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 유릉의 석물
ⓒ 이종원
계비인 순정황후 윤씨의 멋진 일화가 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순종에게 합병조약을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결국은 삼촌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은 여자인 순정황후 윤씨가 지킨 것이다.

▲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 이종원
유난히 단풍 색깔이 강렬하다. 명성황후의 한이 단풍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 이 가을 명성황후의 체취를 한번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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