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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진한 소녀의 자그만 볼처럼 발그레하게 물든 강천산 단풍잎
ⓒ 김정은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중-


전남 담양읍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밤을 꼬박 새우다 출발하여 강천산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입장료 1000원을 내고 강천산 매표소를 지나 등산로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쏫아져 나온다. 이 순간만큼은 완벽하게 내가 아닌 김영랑의 시 속의 누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 감탄사가 '오매'가 되든 '어머나'가 되든간에 그 형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리라. 그 순간의 느낌이 동일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강천사 입구인 도선교에서부터 8km나 이어진 계곡이 단풍으로 붉게 물든 모습
ⓒ 김정은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초입부터 순진한 소녀의 자그만 볼처럼 발그레하게 물든 단풍잎의 선명함에 마음을 빼앗겨 홀린 듯이 걷다보니 어느덧 묵직하고 기묘한 병풍바위가 객을 반긴다. 병풍바위 아래로는 강천사 입구인 도선교에서부터 8km나 이어진 계곡물이 흐르고, 계곡 군데군데 얼굴의 잡티마저 비칠만큼 맑고도 청량한 물이 고여있는 용소 속에 무심하게 떠있는 빨간 단풍잎의 그윽한 잔상을 보노라면 문득 잡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를 바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하는구나! 라는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400여년동안 끈질기게 이어진 흑백논리의 덫

계곡을 끼고 슬슬 걷다보니 영 어울리지 않은 생경한 모습의 기념비가 객이야 보든 말든 한 구석에 심드렁하게 서있었다. '제 6지구 전적기념비'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었던 회문산과 빨치산 총본부가 있던 가마골이 인접해있는 까닭에 6.25전쟁 당시 인민군 빨치산들이 약 5년간 은거하면서 길고도 처절한 유격전을 벌인 이 곳은 비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6.25 당시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가 걸리던 상태에서 최후의 격렬한 일전을 벌이다가 토벌된 아군의 승전지였다.

문득 이 맑은 계곡에 뿌려진 많은 이들의 붉은 영혼과, 존재없이 스려져 간 젊은 청춘들의 한이 붉디 붉은 단풍잎 속에 깃들어 저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네들의 한을 담아낸 것은 단풍뿐만이 아니었다.

▲ 강천사를 들어가는 일주문
ⓒ 김정은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찰, 강천사 경내에 유일하게 남은 석탑에 남겨진 총탄의 흔적에서도, 완전히 불타 다시 지었다는 대웅전과 부속건물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갑갑한 마음에 심호흡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절 뒤로 치솟은 암벽과 입김 한번 불면 우르르 떨어질 것같이 풍성한 감나무가 어울린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지다.

이런 곳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치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이곳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논리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은 전적비에서 뿐만이 아니라 삼인대라는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인대는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순창군수 김정 등 3인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비각이다.

1515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인종)를 낳고 죽자 담양부사 박상 등 3인은 폐비 신씨의 신원(伸寃)과 왕비의 복위를 요구하는 한편, 폐위를 주장하였던 3훈(三勳: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관직을 박탈할 것을 요구한 상소문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모였는데 삼인대라는 이름은 당시 이들이 허리에 차고 온 직인 끈을 풀어 소나무에 걸었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중종반정 성공 직후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가 연산군의 정비로서 부친인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지간이요, 중종(진성대군)과는 장인이라는 묘한 관계로 인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가 반정공신들에게 역적으로 몰려 피살되었기에 역적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는 정치적 의견에 밀려 폐위가 된 비운의 여인이자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나는 폐비 신씨보다는 한 순간에 줄을 잘못 선 관계로 피살된 신수근의 입장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당시 박원종 등으로부터 반정 가담 권유를 받았을 때의 심사가 얼마나 복잡했을까? 사위를 왕으로 옹립한다니 성공하면 부원군이자 반정공신이 되어 좋겠지만 현재 연산군의 왕비로 있는 여동생의 운명은 어찌 할 것이며 괜히 반정에 가담했다가 실패하면 지금 이 안정된 지위를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리게 되니 그냥 중립을 지키는 편이 나으리라 보았을 것이다.

박원종 등 반정공신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신수근의 태도가 기회주의적인 행위라 보았겠지만 박원종 자신도 아마 당시 신수근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자발적인 선택이라면 별다른 걱정이 없지만 문제는 선택을 강요받는데서 일어난다. 이쪽을 따르자니 저쪽이 문제고, 또 저쪽을 따르자니 이쪽이 문제일 때 흔히 우리는 중립을 지키고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때가 분명 있다. 그런데 우리 세상은 너무나 한쪽의 선택을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심하게는 기회주의자니 회색인이니 하고 몰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신수근의 경우도 내편이 아닌 사람은 모두 남의 편이라는 끔찍한 흑백논리가 부른 비극일진대 시간이 흘러도 이 흑백논리는 사라지지 않아 폐비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삼인대의 주역들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을 가게 되었다.

내편이 아니면 모두 역적이요, 내편이 아니면 모두 빨갱이라는 식의 흑백논리의 덫은 1515년에서 1965년에 이르기까지 500년동안 이 심산유곡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사실을 이 강천산에서 우연히 목격하게 되면서 또다시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문득 다시한번 저멀리서 이 곳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부처 모습의 바위를 올려다 보았다. 갑자기 부처바위가 말을 하는 듯하다. "인생무상이요, 색즉시공이라고..."

아찔한 구름다리 너머 붉게 타는 단풍의 능선

강천사와 삼인대 사이를 지나 홍화정 옆길로 들어서면 50m높이에 걸린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보인다. 길이는 대둔산 구름다리보다 긴듯한데 아래에서 본 것만큼 그리 무섭지는 않지만 여러사람이 이 구름다리를 건널 경우에는 사람들의 무게로 인해 다리가 제법 출렁출렁할 것이, 마침 우리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던 꼬마들이 장난삼아 발을 구르니 흔들거리는 폼이 제법 스릴 있다. 이럭저럭 구름다리를 건너 가파른 벼랑을 올라 전망대에 오르면 붉다 못해 타는 듯한 능선의 모습이 수려한 강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폭포수가 떨어지는 병풍바위
ⓒ 김정은
마침 강천산의 단풍을 담기위해 매일 아침 산에 오른다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 말에 의하면 벌써 단풍 잎에 서리가 들기 시작한 것이 어제가 절정이었단다. 그래도 강천사의 단풍은 순수한 토종 단풍나무로 잎이 작고 색갈이 고우며 서리가 내려도 지지 않는 일명 '애기단풍'이라서 11월 초순까지는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거라며 강천산 예찬을 늘어놓으신다.

처음 여기 오기 전에 호남의 금강이라고 불린다는 설명을 듣고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정말 기대한 것 이상의 절경이었다. 사람으로 혼잡한 내장산이나 백양사를 피해 이곳을 택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나 할까?

하산 길에 아까 보았던 병풍바위를 지나치려다 보니 아침에는 볼 수 없었던 웬 폭포수가 병풍바위 위에서 콸콸 쏫아진다. 순간 조작의 냄새가 나는 것같아 떨떠름하게 나오는 길에 매표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역시 병풍바위를 이용한 인공폭포란다.

이 폭포를 틀기 위해 전기요금이 얼마가 나온다는 얘기까지 곁들여서 듣다보니 물줄기가 시원해보여 좋기는 하지만 바위 자체의 기묘한 자태만으로도 충분할텐데 굳이 더 보기 좋으라고 그 세찬 물줄기를 흘려보내면 결국 바위 자체의 기묘한 자태가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객적은 생각이 들었다.

자연 훼손이냐? 관광자원 개발이냐? 이러고 보니 나 또한 이중논리의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강천산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대나무숲테마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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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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